영월 천년 - 월기 경춘의 슬픈 사랑 이야기

박삿갓의 일상사 모음 2023. 10. 7. 17:00

낙화암에 얽힌 영월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 창작 뮤지컬 영월천년 /
"춘향전의 모티브가 된 영월 기생 경춘의 이야기"

영월군은 야간관광 활성화사업 ‘영월 인 더 나잇’의 일환으로 지난 8월부터 10월 28일까지 매주 금·토 오후 8시에 관풍헌에서 창작 뮤지컬 ‘영월 천년 -월기 경춘’ 공연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경춘은 조선 영조 시대 인물로, 양반으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고 이웃이었던 기생 추월에게 입양되면서 15세에 영월의 관기가 됐다. 노래, 춤, 시, 그림에 뛰어났다고 알려진 경춘은 영월 부사의 아들 이수학과 사랑에 빠지지만 부사의 발령으로 인해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헤어지게 된다. 그 후 새로 부임한 부사 신광수가 수청을 강요하자 경춘은 결국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이 이야기가 전해져 당대 문장가로 유명했던 신광수는 파직되고, 후에 금강정에 ‘월기경춘순절지처비’가 세워져 정절의 귀감이 됐다.

행사명 : 영월 천년 - 월기 경춘
기 간 ; 2023. 8. 4 ~ 10. 28 매주 금/토 저녁 8시
징 소 : 영월부 관아 (관풍헌 경내)
입장료 : 무료
주최/주관 : 영월군 / 극단 '시와 별'

줄거리
춘향전의 모티브가 된 영월의 실화로 '기생 경춘'의 삷을 그린 작품으로, 춘향전이 소설이라
해피엔딩인데 반해, 영월 기생 경춘은 영월 낙화암에서 투신하는 비극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현대에 들어와 잊혀가던 이 이야기를 되살려 올해 지역 극단인 ‘시와 별’이 창작한 뮤지컬 ‘영월 천년 - 월기 경춘’은 70분 가량의 야외극으로 진행되며
신나는 기생들의 무대, 이수학과 경춘의 사랑, 추월과 경춘의 서로 다른 사랑에 관한 생각 등 다양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관객들이 일부러 공연을 보러 영월에 찾아올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는 ‘영월천년 월기 경춘’은 오는 10월 28일까지
매주 금, 토요일 오후 8시에 영월읍 관풍헌(중앙로 61)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공연과 앞서 열리는 문화야시장은 오후 6시부터 다양한 먹거리와 영월 여행의 기념이 될 소품을 관풍헌 내에서 판매한다.
또한, 오후 7시부터 지역 예술인과 뮤지컬 배우들의 펼치는 식전 공연도 준비되어 있어 다양한 문화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아울러 방문객들에게 영월의 이야기가 담긴 상품과 야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증정하는 등 호응을 얻고 있다.

10월 6일(금요일) 오후 7시 30분경 관풍헌에 도착해 보니.. 차거운 밤 기온으로 문화야시장은 한산한 편이다.

낭만적인 영월의 밤별처럼 빛나는 나.. 

관풍헌 편액과 처마 모습이 예스럽고.. 옛 관아 앞마당에는 경춘가와 이별가의 노랫말이 보인다.

경춘가 / 작사 상지윤, 작곡 김은지
바람이 소슬하니 달빛도 차갑구나
임이 떠나고 한 계절 보내고 나니
오늘에야 알겠구나
나의 운명은 그리움이구나..   (*이하 생략)

영월 출신 무명 가수의 사전 공연... 현재 농사를 짓고 있으며.. '10월에 마지막 밤'을 노래한다.

오후 7시 50분경.. 출연진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며.. 영월의 여인들아.. 내 사랑을 받아주오.. ♪♬♩

뮤지컬 사회자인 듯한.. 남, 여 두 사람이 무대 아래편으로 나와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진행을 한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영월읍에 고순익(高舜益)이라는 마음씨 착한 선비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고순익은 평소에 단종(端宗)[1441~1457]을 추모하면서 자식 얻기를 열망하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단종이 돌아가신 지 300년 후 기일[1757년 10월 4일]에 예쁜 딸을 얻었다.

삼신 할매와 노산군이 점지한 아이가 태어났지..

고순익은 단종인 노산군(魯山君)이 점지하여 준 옥(玉)같이 소중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노옥(魯玉)’이라고 지었다. 노옥은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글도 잘하여 부모님과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마님 닮아 어여쁘고 어르신 닮아 총명하고..

노옥 아씨 어여쁘니 웃음꽃이 가득하네.. / 어화둥둥 어화둥둥 곱디곱게 키우리..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노옥은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을 꾸려 나갔다.

그 후 의지할 곳이 없던 노옥은 할 수 없이 이웃에 사는 추월(秋月)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하지만 양어머니인 추월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노옥도 결국은 기생이 되고 말았다.

어린 경춘의 노랫소리가 애처롭다.. 슬플 때는 고갤 들어 하늘을 봐요..

징 소리가 울리고.. 이런 슬픈 이야기도.. 패랭이 모자를 쓴 사회자 두 남, 여는.. 마당극의 변사(辯士) 같이 좀 웃긴다.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나.. / 나는 왜 홀로 남겨졌나..

탓하면서 살아간들 / 내 뜻대로 살아지나..

정해진 운명에 서러워.. /.어느 누가 들어주나..

1771년 어느 이른 봄날, 여느 때와 같이 열다섯 소녀 경춘(瓊春ㆍ본명 고노옥)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빼어난 미모는 늘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숱한 유혹을 뿌리쳐 왔다.

경춘은 어린 나이에 사고무친(四顧無親), 막 관기(官妓)가 된 신분이었지만 늘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 해 정월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李萬恢)를 따라 내려온 아들 시랑(侍郞) 이수학(李秀鶴)이 경치좋은 금강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건너편 경춘의 미모에 눈길이 멈췄다. 그 역시 첫눈에 반했다.

해는 지는데 이 마음은 타오르네.. / 그날 널 보고 오늘도 잠 못 들고..

우리 서로 좋아하니 이것이 사랑.. /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

하지만 신분도 고향도 다르다고.. / 무서운 운명이 될 무서운 사랑..

약속하오 맹세하오.. / 그대의 사랑 되리라..

그러나 영월부사인 아버지가 한양으로 영전하니 이수학은 경춘에게 과거에 급제한 후에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서울로 떠나고 말았다.

수양어머니인 늙은 기생 노기(老妓) 추월의 걱정 어린 노랫소리는 심금(心琴)을 울린다.
나이를 먹고 보니.. 그깟 사랑 곳간에 넣어둔 쌀 한 가마니만도 못하더라.. 그만 잊거라..

덩이라는 이름의.. 달덩이같이 생긴 기녀도.. 뭔가 슬프다. ㅠ,ㅠ

이수학(李秀鶴)과 헤어진.. 그 해 10월 21일 당대의 문장가인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신관 사또 부임 축하연으로 영월 기생들이 춤판을 벌리는데...

신나는 기생들의 무대.. 완전 현대판으로 정말 신나고 재미있다. ㅎ

여기저기 사랑꾼 숲 속에 숨어들고.. / 거기 숨어 뭐하나 들키면 부끄럽네..

(달)덩이까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영특한(영월의 특별한) 춤을 선보인다.

새로 부임한 부사 신광수가 경춘의 미모에 반해 수청 들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경춘은 수학과 백년가약을 맺은 정표도 보이며 부사의 청을 거듭 거절하다 수차례 걸쳐 추초(箠楚ㆍ볼기를 치는 형벌)를 받았다.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 부사를 찾아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기를,
“며칠간 만 부름을 멈춰주시면 병난 몸 잘 추스려 원하는 바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윤허를 받았다.

이제서야 알겠구나.. / 나의 운명은 그리움이구나..

떨어진 꽃잎처럼 눈물이 마르면.. / 모두 잊겠지 그리움도 잊겠지..

밤마다 임은 멀어지고.. / 볼 수 없는 그리움 되고..

이튿날 아버지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금장강(동강) 변으로 향했다.
동생 머리를 빗겨준 후 벼랑 위에 앉아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이 치마를 흠뻑 적시고 슬픔과 한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경춘은 옆에 있던 동생을 달래 돌려보내고 한 송이 꽃으로 강물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임진년 10월,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1773년 12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월부사 신광수를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면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경춘이 금강정에서 투신한 지 두 달 후에 영월부사 신광수는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1724~1776)는 당대 문장가인 신광수를 아꼈으나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파직했다고 한다.

무대의 조명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경춘은 무대 뒤로..

강물이 흐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 바람이 붑니다 계절이 흐릅니다..

금강정에 오르면 그들이 속삭이네.. /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

당신은 누굴 사랑하나요.. 당신에겐 어떤 사연이 있나요..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 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두 팔을 펼치며 공연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출연진들이 관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공연 후.. 관람객과 출연진이 같이 하는.. 포토 타임도 있다.

밤 9시 20분경.. 영월부 관아 담장길로.. 자규루 앞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동강다리를 건너가.. 덕포 마을 제방에서 바라본 금강정.. 조명 불빛이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에 촛불처럼 어린다. 

지난 세월을 당기듯.. 줌(zoom)으로 당겨 보았으나.. 수학과 경춘의 모습은 어둠에 숨어 보이지 않네..

YeongWol in the Night 영월 인 더 나잇, 야간 관광 활성화 프로그램 4야(夜)

▲ 밤에 보는 공연 이야기(夜說·야설), ▲ 밤에 비춰보는 문화재(夜景·야경),
▲ 밤에 걷는 거리(夜路·야로), ▲ 밤에 먹는 음식 이야기(夜食·야식)

금강공원내에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處)"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 바,
이 비는 강원도 순찰사 巽菴(손암) 李公이 비용을 내고 평창군수 南羲老(남희로)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경춘이 죽은지 24년만인 을묘(1795) 8월이었다.

비문의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월기 경춘은 이시랑이 영월에 왔을 때 처음 몸을 허락한 터이기에
깨끗이 수절하려 하였더니 후임관원이 온 뒤 자주 불러 볼기를 때리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몸단장을 잘하고 들어가서 웃는 낯으로 몸을 조섭할 것이니 수일후에 불러주면 한번 욕정을
들어 주겠노라고 하고 그 이튼날 아침 부친산소를 성묘하직하고 돌아와 동생의 머리를 최후로
빗겨준 다음 바로 금강 벼랑에 앉아 몇가락의 노래를 부르니 눈물은 옷 자락을 적시었고,
비통함은 참기 어려웠다.

이 때 어린 동생이 따라와 있었으므로 속여서 집으로 보내 놓고 분연히 벼랑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으니 때는 임진년(1772)10월이었고 그 때 나이 16세였다.

집안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옷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있어 옷을 헤치고 보니 이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의 죽음이여, 의로움을 좇음이 아니리오. 이번에 도순찰사 손암 이공이 관동지방을 살피던 길에 영월을 지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 주도록 이르니 나 또한 그 전말을 적게 되었는지라 생각컨대 경춘이 죽은지 24년이라 우리 이공이 이를 처음 표창함이니 경춘의 절개는 장차 지워지지 않으리라」

※ 출처 : 지역정보포털 향토자원 > 문화

※ 아래에 故 박영국 선생 작사 '경춘의 노래'를 소개한다.
    (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영월을 찾아서' 내용 인용)

1. 춘양같이 사랑하다 떠난임 그리던중
신임사또 수청피해 애인정표 지니고서
금강정에 몸던지니 이시랑을 울렸다네
2. 눈물을 감추고서 부모산소 성묘하고
어린동생 머리빗겨 집에다가 달래놓고
노래불러 낙화하니 동생을 울렸다네
3. 아름답던 고경춘은 이고장의 귀염이라
시녀같이 순절하니 천기에도 절개있네
그를기려 동정하는 세상을 울렸다네

봉래산 아래 금강정을 지나 낙화암 쪽으로 가다 보면, 가파른 절벽 위에 「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의 기생으로서 영월부사 신광수(申光秀)의 수청을 거절한 채 낙화암에 투신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킨.. '영월 기생 고경춘'의 순절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현대 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다.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떨어진 자리에 1795년(정조19년) 8월 강원도순찰사 이손암(李巽菴)이
월주(영월)의 절행부를 살피던 차 이 이야기를 듣고 “천적(賤籍)의 몸으로 이런 일을 해내다니 열녀로다.
어찌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봉급을 털어 영월군수에게 순절비를 세우도록 했다.

경춘이 죽은 지 24년 만이다.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09cm, 폭 47cm, 두께 14.5cm다.

※ 월기경춘순절지처비문(탁본) *원본보관 : 영월문화원

비석 앞 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越妓瓊春殉節之𠙚 (*𠙚는 處의 속자)
(후면)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一日盛服而入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 其年十六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此眞烈女也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乙卯八月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 비문 해석 ▽▽▽

(전면) 월기경춘순절지처
(후면)
영월기생 경춘(瓊春)은 예전 이 시랑(李侍郞)이 영월 땅에 부임해 왔을 때, (서로)눈에 들은 바 되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런 고로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여 수절코자 하였는데, 후임 관리(부사)가 오게 되자 관아 내의 사람으로 그녀를 강제하는 자가 있어서, 수차례 추초(?楚: 볼기를 치는 형벌)를 당하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서 (관아에)들어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만약 수일간만 부름이 없다면, 마땅히 병난 몸을 잘 조섭하고는 원 하는 바(욕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마침내 아버지 묘소로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와 여러 동생들을 위해 머리를 빗겨 주었다. 이어서 일어나 금장강(동강)변으로 가서는 벼랑 끝 단애에 앉아서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은 치마를 적시는데, 슬픔과 한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린 동생이 옆에 있었기로, 이에 그를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고는, 즉시 분연히 몸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니, 때는 임진년 10월로 그녀 나이 16세였다.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옷깃을 건져 올리는데, 무엇인가 은연히 비치는 것이 있어서 꿰맨 자리를 뜯고서 보니, 과연 이 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녀의 죽음은 지난날 의를 위해 의연히 목숨 바쳤던 이들과 견주어 볼 때, 못함이 없지 않은가!

이제 도순찰사(都巡察使) 손암(巽菴) 이공이 대총재(大?宰)로서, 관동의 절행부(節行部)를 살피던 차에 월주(영월)를 지나다가 보고를 접하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천적(賤籍)에 오른 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니 이는 참으로 열녀로다. 어찌 풍성지도의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봉급을 내어 영월군수에게 그녀가 순절한 곳에 일편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기도록 부탁하고, 또한 나에게는 그 전말의 내용을 기(記)하도록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오늘로 2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드러내어 표장하게 되었으니, 우리 공(巽菴 李公: 李秉鼎)이 아니었다면 경춘의 절행 그것은 어쩌면 인몰되어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을묘(1795년, 정조 19년) 8월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문을 짓고, 영월군수 한정운(韓鼎運)이 비문을 쓰다.

▽▽▽ 구절별 비문 해석 ▽▽▽

(전면)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 영월 기생 경춘 순절한 곳
(후면)
越妓瓊春(월기경춘) 영월기생 경춘(瓊春)은
故李侍郞莅越時(고이시랑리월시) 예전 이 시랑(李侍郞)이 영월 땅에 부임해 왔을 때,
所眄以其初許身也(소면이기초허신야) 눈에 들은 바 되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故欲自潔以守(고욕자결이수) 이런 고로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여 수절코자 하였는데,
及後官之來(급후관지래) 후임 관리(부사)가 오게 되자
衙內人有强之者(아내인유강지자) 관아 내의 사람으로 그녀를 강제하는 자가 있어서,
數被箠楚(수피추초) 수차례 추초(箠楚: 볼기를 치는 형벌)를 당하매,
殆不能堪(태불능감)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一日盛服而入(일일성복이입)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서 (관아에)들어
言笑自如曰(언소자여왈)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倘無數日呼喚(당무수일호환) “만약 수일간만 부름이 없다면,
當調病軀(당조병구) 마땅히 병난 몸을 잘 조섭하고는
一聽所欲(일청소욕) 원 하는 바(욕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翌朝遂往訣其父墳(익조수왕결기부분) 이튿날 아침 마침내 아버지 묘소로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歸爲諸弟梳(귀위제제소) 돌아와 여러 동생들을 위해 머리를 빗겨 주었다.
仍起往錦障江邊(잉기왕금장강변) 이어서 일어나 금장강변으로 가서는
坐於絶石崖歌數闋(좌어절석애가수결) 벼랑 끝 단애에 앉아서 노래 몇 수를 부르니
泣下沾裳(읍하첨상) 눈물은 치마를 적시는데,
悲恨不自勝時(비한불자승시) 슬픔과 한을 누를 수가 없었다.

稚弟在傍(치제재방) 그 때 어린 동생이 옆에 있었기로,
乃詒而使之去(내이이사지거) 이에 그를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고는,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즉분신투수사세임진십월) 즉시 분연히 몸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니, 때는 임진년 10월로
其年十六(기년십육) 그녀 나이 16세였다.

家人奔往(가인분왕)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拯之衣衿(증지의금) 옷깃을 건져 올리는데,
有隱映物(유은영물) 무엇인가 은연히 비치는 것이 있어서
裂縫視之(열봉시지) 꿰맨 자리를 뜯고서 보니,
乃李侍郞筆(내이시랑필) 과연 ‘이 시랑’의 필적이었다.

嗚呼 其死也(오호 기사야)오호라! 그녀의 죽음은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시고지종용취의자하여재)지난날 의를 위해
의연히 목숨 바쳤던 이들과 견주어 볼 때, 못함이 없지 않은가!
今都巡察使巽菴李公(금도순찰사손암이공)이제 도순찰사(都巡察使) 손암(巽菴) 이공이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이대총재출안관동절행부) 대총재(大冢宰)로서, 관동의 절행부(節行部)를 살피던 차에
過越州聞而奇之曰(과월주문이기지왈) 월주(영월)를 지나다가 보고를 접하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以賤籍而乃能辨此(이천적이내능변차) “천적(賤籍)에 오른 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니
此眞烈女也(차진열녀야) 이는 참으로 열녀로다.
烏可無樹風聲之道乎(오가무수풍성지도호) 어찌 풍성지도의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수연봉속월수비입일편석식기처) 마침내 봉급을 내어
영월군수에게 그녀가 순절한 곳에 일편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기도록 부탁하고,
又屬余記其顚末(우속여기기전말) 또한 나에게는 그 전말의 내용을 기(記)하도록 부탁하였다.

余惟瓊春之死(여유경춘지사)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距今爲二十四年(거금위이십사년) 오늘로 24년이 지나서야
始得表顯之(시득표현지) 비로소 그녀를 드러내어 표장하게 되었으니,
微我公瓊春之節其將湮沒而已也(미아공경춘지절기장인몰이이야)
우리 공(巽菴李公秉鼎 손암이공병정)이 아니었다면
경춘의 절행 그것은 어쩌면 인몰되어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乙卯八月(을묘팔월) 을묘(1795년, 정조 19년) 8월
平昌郡守南羲老記(평창군수남희로기)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문을 짓고,
寧越府使韓鼎運書(영월부사한정운서)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비문을 쓰다.

[헤럴드경제=영월]1771년 어느 이른 봄날, 여느 때와 같이 열다섯 소녀 경춘(瓊春ㆍ본명 고노옥)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빼어난 미모는 늘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숱한 유혹을 뿌리쳐 왔다.

경춘은 어린 나이에 사고무친(四顧無親), 막 관기(官妓)가 된 신분이었지만 늘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 해 정월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李萬恢)를 따라 내려온 아들 시랑(侍郞) 이수학(李秀鶴)이 경치좋은 금강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건너편 경춘의 미모에 눈길이 멈췄다. 그 역시 첫 눈에 반했다.

수학은 나룻배의 노를 저어 건너갔다. 마주한 두 남녀, 설레는 가슴으로 수학이 고백했다. 그리고 백년가약을 했다.
경춘도 뿌리치지 않았다. 이후 둘의 사랑도 점점 무르익어 갔다. 경춘은 마침내 수학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된다.

달콤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듬해 영조48년 7월29일 문신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전교를 받고 이만회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수학도 경춘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수학은 떠나기 전 ‘입신(立身)해 훗날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의 글을 써서 경춘에게 정표로 남겼다. 경춘은 언제나 품에 안고 기다렸다.

그 해 10월 21일 새로 부임한 부사 신광수가 경춘의 미모에 반해 수청 들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경춘은 수학과 백년가약을 맺은 정표도 보이며 부사의 청을 거듭 거절하다 수차례 걸쳐 추초(箠楚ㆍ볼기를 치는 형벌)를 받았다.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 부사를 찾아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기를,
“며칠간 만 부름을 멈춰주시면 병난 몸 잘 추스려 원하는 바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윤허를 받았다.

이튿날 아버지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금장강(동강) 변으로 향했다.
동생 머리를 빗겨준 후 벼랑 위에 앉아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이 치마를 흠뻑 적시고 슬픔과 한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경춘은 옆에 있던 동생을 달래 돌려보내고 한 송이 꽃으로 강물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임진년 10월,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건져올려보니 옷 속에 뭔가 꿰맨 자국이 있어 풀어봤다. 수학이 건넨 정표였다.
수청을 강요했던 부사 신광수는 이듬해인 1773년(영조49년) 12월에 영월부 감사 과정에서 교체됐다.

관기 경춘. 본명은 고노옥이다.
영월 선비 고순익(高舜益)이 자식이 없어 태백산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해 얻은 귀한 딸이다.
이곳에 유배온 단종임금(노산군ㆍ魯山君)이 점지해 준 소중한 자식이라 해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지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살에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어 어린 동생과 함께 이웃의 추월이라는 기생 수양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양어머니도 연로해져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관기가 된 경춘은 어렸지만 타고난 미모와 가무솜씨가 남달랐다.

춘향전, 아니 경춘전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와 이렇게도 똑같을 수가..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만 빼면 전개되는 이야기가 완전 그대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250년 전 강원도 영월 고을에서 있었던 실화다.

춘향전 보다 더 춘향전 같은 이 비련의 이야기. 영월 관기 경춘, 고노옥의 한맺힌 사연이다.
그 생생한 이야기가 비석에 새겨져 200년 넘게 그대로 전하고 있다.

※ 출처 : 헤럴드경제 남민기자의 천천히 걷는 감성여행
[테마있는 명소] 영월 낙화암--‘실존 춘향’ 영월 관기 경춘을 아시나요

금강정(錦江亭)과 낙화암(落花巖)으로 이어지는 깎아지른 절벽(병창)!

낙화암으로 가는 길 오른편 절벽으로 '월기경춘순절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 한문으로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서 동쪽으로 가면 낙화암이라는 절벽이 나온다.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도
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는데 절벽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낙화암(花巖)'이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낙화암((落花巖)은 금강정 쪽 동강의 높은 절벽 위에 있는데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이곳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
이들이 투신 순사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두 곳의 낙화암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의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부여의 백마강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곳 영월의 낙화암이다. 금강정 절벽에 동쪽으로 있는 마지막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으로 가는 길에 테크를 만들어 다니기는 편하지만.. 절벽이 보이던 옛적 풍경이 사라진 점이 아쉽다.

※ 아래는 낙화암 부근 절벽(영월 말로 뼝창)에 '落花巖'이라 새겨진 암각문으로,
   글자 한 자의 크기가 가로 X 세로 약 1m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 자료)

▲ 1742년(영조 18)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가 낙화암 절벽에 새긴 '落花巖' 세 글자

'월기경춘순절비' 관련 자료

월기경춘순절비 [越妓瓊春殉節碑]

강원도 영월군 금강공원 내에 있는 비석으로 관기(官妓) 경춘의 절개를 기려 세웠다.

영월의 관기(官妓)였던 경춘(瓊春)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영월 군민의 휴식처인 동강 강변의 금강공원에 있다. 비석의 높이는 109cm, 폭은 47cm, 두께는 14.5cm이다. 경춘이 죽은 지 24년 만인 1795년(정조 19)에 세워졌으며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쓰고, 강원도순찰사 이손암(李巽菴)이 건립비용을 댔다.

경춘은 영월부사 이만회의 아들 이수학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이만회가 한양으로 영전해가게 되자 이수학은 과거에 급제한 뒤 백년가약을 맺겠다 하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 후 새로 부임한 영월부사 신광수가 경춘에게 수청을 강요하자 경춘은 부친묘를 찾아 성묘하고, 동생의 머리를 빗겨준 후 이수학이 주고 간 증표를 지닌 채 강가 벼랑에서 몸을 던져 절개를 지켰다. 이때 경춘의 나이 16살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기경춘순절비 [越妓瓊春殉節碑] (두산백과)

세간에서 보통 월기경춘순절비라고 부르는 비의 공식 명칭은‘월기경춘순절지처비(越妓瓊春殉節之處碑)’이다.

월기경춘순절비는 건립된 이후 원래 위치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오솔길에 비만 세워져 있었으나 이후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건립된 지 220여 년이 흐르면서 뒷면의 비문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으며 일부는 고의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다. 비문에는 없으나 경춘이 살았던 마을은 덕포리 상덕촌이고 아버지는 고순익(高舜益)으로 단종[노산군]이 점지한 딸이라고 하여 어릴 때 노옥(魯玉)으로 불렸으며 이시랑은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 이수학(李秀鶴)으로 전한다. 1772년 당시 영월부사는 구협(具埉)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영월문화대전-월기경춘순절비 내용 요약)

기타 참고 자료

금강정(錦江亭)은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밑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1428년(세종 10년)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세웠고 그 뒤로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 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동으로 금장강에 접해 있고 남으로 금봉연(金鳳淵)이 자리 잡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장강 밖으로 상덕촌(尙德村)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밀적포(密積浦)가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정자 바로 곁에 단종이 죽자 시녀 여섯 명과 한 명의 시조이 몸을 던져 죽은 낙화암(落花岩)이 있으며, 정자 뒤편으로 민충사(愍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경춘이 살았던 덕포리 상덕촌(尙德村)은.. 덕포상리(德浦上里)인 약물내기, 대내, 봉래중학교 부근의 마을로 덕포리의 가장 위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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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포리(德浦里)
영월군 군내면 지역으로 크게 웃말(上里), 중말(中里), 아랫마을(下里)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일제 시대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나루터(현재 동강교) 위쪽인 상덕촌(尙德村)과 그 아래쪽 밀적포(密積浦)에서 '德'자와 '浦'자를 따서 '德浦里'라 하였으며 '德'은 '크다'라는 뜻이다. 조선 성종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정에서 바라다 본 덕포리의 풍경을 『강 건너로는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과 울타리들이 뽕나무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하며, 그 남쪽 밀적포(密積浦)에는 나무들이 울창하여 마을의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그곳을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덕포리는 현재 1,664가구에 6,93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상리, 중리, 하리, 대내, 옹기점말 등에서 거주하고 있다.
(*영월문화웡 홈페이지 지명 자료 참조)

※ 아래 사진은.. 현재 봉래중학교 학교 앞 사거리에 있는, 마을회관(경로당) 앞쪽에 세워진.. 덕포상리(德浦上里) 마을 표지석임.

※ 덕포리(德浦里) 강둑(堤, 제방)에서 금장강(錦障江, 동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금강정(錦江亭) 전경.

*동강(東江)의 옛 이름이 금장강(錦障江)임.
『영월부읍지』에는 금장강(錦障江)으로기록되었는데,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오대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정선으로부터 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월군읍지』에는 금강(錦江)으로 나온다. (*한국지명유래집 참조)

*금강정(錦江亭)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붉은 단풍잎이 어리어 마치 한 폭의 비단 같아 보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어릴 적.. 강변쪽 덕포마을에 기생도 있던 요정이 있었는데, 그 집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강 건너편 금강정이 바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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