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천등산 봉정사 (天燈山 鳳停寺)

박삿갓의 여행 이야기 2017. 1. 3. 21:00

안동 천등산 봉정사 (天燈山 鳳停寺)

 

2017년 새해 아침.. 울진 망양정 앞바다에서 해맞이를 하고,  백암온천에서 심신을 씻고,

평해에서 아침.. 청송 신촌약수에서 점심 식사 후..  안동의 고찰(古刹) 봉정사를 들린다. *^^

 

16:10 천등산 봉정사로 들어선다. *관람료; 어른 2,000원(65세 이상 무료) 청소년, 군인 1,300원 어린이 600원

           65세 이상 경로는 무료인데.. 한 친구가 아직 생일이 안 지났다고.. 저 아저씨는 안돼요! 한다. ㅎ

 

 

매표소에서 약100m쯤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퇴계가 지었다고 하는 정자 명옥대(鳴玉臺)가 있고,

명옥대를 지나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5분 정도 더 올라가면 봉정사 일주문(一柱門)이 보인다. *^^

 

 

천등산은 옛적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있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불문에 들어와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같은 것은 아랑곳 없었다.

이렇게 십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나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 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년을 애써 쌓아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게 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여인이 사뿐이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와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등의 덕택으로 수도하였다하여 그 굴은 '천등굴'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상 봉정사 홈페이지 '봉정사 창건설화' 자료 인용)

 

 

사찰의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一柱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 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다.

이렇게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一心)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200m 정도 더 올라가면..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만세루가 올려다 보인다.

만세루(萬歲樓)는 봉정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2층의 누각 형태를 한 누문(樓門)이다. *^^

 

 

봉정사 [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정사 [鳳停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봉정사 배치도 ① 대웅전 ② 극락전 ③ 화엄강당 ④ 고금당 ⑤ 만세루 ⑥ 요사채 ⑦ 삼성각

 

천등산 봉정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도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들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누구나 봉정사에 오면 심신의 피로를 다 잊어버리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등반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더없이 좋은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상 봉정사 홈페에지 '봉정사 소개' 게시 자료 인용)

 

※ 아래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돌계단 오르막길부터.. 아주 오래된 사찰 같은 느낌이 든다.

 

 

돌계단 옆으로 보이는 우람한 모습의 소나무는 수령 180년의 보호수이다.  

 

 

봉정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에 들어가려면 만세루(萬歲樓)라는 중문(中門)을 통과해야 한다.

만세루는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1680년(숙종 6)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 누문의 명칭은 원래 덕휘루(德輝樓)이었는데, 지금의 명칭으로 개칭된 것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天燈山鳳停寺」 편액 안쪽으로 보이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에 귀의(歸依)한다는 의미이다.

(*현판이란 건물의 명호(名號)를 널판지나 비단 또는 종이에 써서 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하며 편액(扁額)이라고도 부른다.)

 

나무아미타불 [ 南無阿彌陀佛 ]  
남녘 남, 없을 무, 언덕 아, 두루 미, 험할 타, 부처 불.
불교용어로, 염불하는 소리의 한 가지. 아미타불에 歸依(귀의)한다는 뜻.
*나무(南無)는 귀명, 구아 등으로 번역함. 後生(후생)을 구원하여 달라는 말임.

*아미타불( 阿彌陀佛)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나무 [ 南無 ]
부처나 보살의 명호 앞에 관사(冠詞)로 붙어있는 나무(南無)라는 말은 범어(梵語)의 Namasa를 음사(音寫)한 말로

귀명(歸命)이라 번역한다. 귀명이란 글자그대로 신명(身命)을 던져 돌아가 의지함을 뜻한다.

모든 생명의 존재는 본연청정(本然淸淨)한 진여(眞如)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에 의해 그 근원을 스스로 배반하고 거짓의 허상에 사로잡혀 번뇌와

속진(俗塵) 속에 살고 있다. 귀명은 이러한 거짓과 잘못을 던져버리고 본래의 진실, 옳음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 [南無]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만세루 1층(一層)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自然石 基壇)에 주춧돌(柱─乭)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먼저 만세루 누문(樓門)을 지나.. 대웅전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춧돌 위에 버티고 있는 누각 기둥의 벌레 먹고 낡은 모습에 한참을 살펴보고 들어간다. 

 

 

마루 위 기둥에는.. '건물이 기울고 있어 정밀안전진단 중입니다. 안거나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누각에는 '萬歲樓'라는 현판이 보이고, 법고(法鼓) 좌우로 목어(木魚), 운판(雲板)이 걸려 있다.

범종(梵鍾), 법고, 운판, 목어를 '불전사물(四物)'이라 하는데, 무게 때문에 범종은 따로 둔 것 같다.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법고는 축생 제도와 이 땅에 사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친다. 

운판(雲板)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가장자리에는 승천하는 용이나 옴마니반메훔 등의 진언을 새기기도 한다.

옛날에는 부엌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으며, 구름 모양을 한 것은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으므로

화재 예방을 하기 위해 부엌에 달아 놓았다는데 근래에 와서 불전사물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을 제도하고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친다.

목어(木魚)는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불전사물로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치고,

범종(梵鍾)은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친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당이다.
1963년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係) 건물로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여겨지고 있는데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할 때 새로 대웅전을 지어 봉정사의 구획을 지금과 같이 다시 잡았다고 보는 관점도 있어

이렇게 본다면 고려 말 건물이 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포계 건물이 된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면서 세종17년(1435년)중창을 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건축부재의 연령이

600여년 이상인 것으로 밝혀져 보물55호에서 국보 311호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국보 제311호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金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만세루(萬歲樓) 등이 있다.

 

 

2000년 2월 봉정사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이 고려말에 제작되었다는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목조건축물은

극락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라는 연구가 새롭게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이 500여년 전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

(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시주하다.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 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이상 봉정사 홈페이지 '봉정사 연혁' 게시 자료 참조)

 

※ 아래 대웅전(大雄殿)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寶物 第五五号 鳳停寺 大雄殿」 표지석이 보인다. (*현재는 國寶 제311호임)

 

 

봉정사 만세루 [鳳停寺 萬歲樓]

봉정사 만세루는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이 있는 중심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봉정사 중심 경내는 구릉의 경사면에다

두 층의 너른 평지를 마련하기 위해 높은 축대로 둘러쌓았는데, 출입을 하려면 경사면을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축대의 중심부를 틔워 계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이층 누각을 올려 계단과 출입문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래에서 경내로 들어오는 데에서는 문의 역할을 하지만, 경내에서 보면 경관을 조망하는 정자 역할을 한다.

정자의 역할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봉정사의 누문이 만세루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정사 만세루 [鳳停寺 萬歲樓]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웅전 앞으로 보이는 만세루(萬歲樓)..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사찰 누각 이름으로 흔히 사용되는 ‘만세루(萬歲樓)’는 부처의 법이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엄강당(華嚴講堂)

화엄강당(보물 448호)은 화엄사상을 가르치던 강의 장소로서 스님들의 수행 공단이기도 하다.

현재, 화엄강당은 종무소로 쓰고 있으며, 고금당은 선방이였으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스님들이 불교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강당 건물이다.

※ 아래 화엄강당(華嚴講堂)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대웅전 앞 뜰에서 화엄강당 옆을 지나.. 극락전 마당 앞으로 간다.

 

 

극락전 앞 마당 입구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범종각(梵鐘閣).. 오래된 범종은 아니고 근래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 범종(梵鐘)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는 의식을 행하고자 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고금당(古金堂)

고금당(보물 제44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극락전 앞뜰에 동쪽을 향하여 세운 건물이다.

극락전과 하나로 묶이는 정통 신앙의 영역으로, 아미타불의 원력에 힘입어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염불 수행의 공간이다. 화엄강당이 학습의 공간이라면 고금당은 기도의 공간인 것이다.

 

‘고금당(古金堂)’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예전에 금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것 같기도 하다.

’金堂’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가장 중요한 중심건물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고금당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 네 기둥의 글귀를 모으면 詩 한 수가 된다.  물론 오른쪽부터.. *^^

(*예전 고금당 사진을 보면 주련(柱聯)이 걸린 것이 보이지 않는데.. 나중에 걸었나 보다.)

 

未生之前 誰是我  (미생지전 수시아)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我生之後 我爲誰  (아생지후 아위수)    세상에 태어난 후 내가 과연 누구던가?

長大成人 讒是我 (장대성인 재시아)    자라나서 사람되어 잠깐 동안 내라더니,

合眼朦朧 又是誰  (합안몽롱 우시수)    눈 한 번 감고 나면 내가 또한 누구련가?

*청나라 3대 황제인 순치제의 출가시  順治皇帝 出家詩 일부

 

*주련(柱聯)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경전이나 큰스님들의 법문 등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전언들을 새겨

  기둥에 걸어두는 것으로, 기둥[柱]마다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柱聯)이라 부른다.  

 

 

고금당은 '원래의 금당'이라는 의미로 고려시대 봉정사의 원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

1616년 중수했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본다면, 16세기 초에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면이 3칸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승방으로, 극락전에 딸린 노전(爐殿) 역할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봉정사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건축, 2004. 11. 30., 솔출판사)

 

이 건물의 전신이 금당(金堂)이었다면 봉정사에 극락전과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 초창기 암자 시절 때의 일일 것이다.

이후 절의 중심이 새로 지어진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이동하게 되자 ‘옛 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 아래 고금당(古金堂)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대웅전과 극락전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 옆으로 나란히 있어 한 절에 중심이 둘 있는 매우 드문 배치이다. *^^

대웅전은 화엄강당과 무량해회가 양쪽에 있고, 극락전은 고금당을 한 옆에 둔 아담한 마당을 가지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 시에

상량문에서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 (국보15호)으로 인정 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봉정사 홈페이지 '봉정사 연혁' 게시 내용 참조) 

 

※ 참고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은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1962년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그동안에는 1916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1376년(우왕 2)에 보수한 사실과 함께

1377년에 재축한 조사당 건물과 비교할 때 그보다 약 100~150년 전으로 추정하여 무량수전을 국내 최고 목조건물로 공인했었다.

봉정사 극락전도 1363년(공민왕 12) 지붕을 중수했다는 사실 이외에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없는 점은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건축양식이 무량수전보다 앞선 12~3세기에 지어,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은 국내 최고의 목조건물로 평가받은 것이다.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봉정사 극락전! 이제는 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수정하였다고 하는데,

극락전이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것은 1972년에 해체, 보수하면서 단청을 새로 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극락전 현판 아래에 큰 사발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이 보이는데,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복화반(覆花盤)으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니고,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그대로 조각을 해 놓은 것이다.

*복화반(覆花盤); 아래쪽은 넓고 위쪽은 좁아 화반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화반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672년(문무왕 12)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대장전(大藏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極樂殿)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1972년 해체·수리할 때 중앙칸 종도리(宗道里) 밑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屋蓋) 부분을

중수(重修)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건물의 전면(前面)에만 다듬질된 석기단(石基壇)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주좌(柱座)만을 조각하였고,

초석 위에는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극락전 전면과 측면 중앙칸에 판문(板門)을 달았고

전면 양협간(兩夾間)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며

수리하기 전에는 3칸 모두 띠살 4분(分) 합문(閤門)이 달려 있었다. 이 건물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두산백과)

 

※ 아래 극락전(極樂殿)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정면3칸 측면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 집인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1972년에 해체 복원 할 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能仁)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 안충, 보조, 신경, 밀암 등

여섯 스님이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고 쓰인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말한 ‘지금’이란 조선 인조 13년인 1625년이다. 그리고 축담스님이 지붕을 중수했다는 지정23년은

그로부터 약 260년 전인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이다.

이때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 있었으므로 극락전의 중수에 공민왕이 관여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한 건물이 지어진 후 대체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난 뒤 고쳐 짓게 된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1363년에서 150에서 200년을 빼면 13세기 초 또는 12세기 중엽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1376년에 중건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봉정사 극락전보다 13년 이후이고

수덕사 대웅전은 중수 기록이 아니라 1308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중건과 창건의 연대보다도 더욱 중요한 요인은 봉정사 극락전이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보다 건축 양식이 고식(古式)이라는 점이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으로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이며 맞배지붕으로

공포와 결구 등은 필요한 구조만 있을 뿐 장식이 거의 없는 매우 소박하고 간결한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가운데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은

복원하면서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았다는 견해가 있었으나 최근 발표에 따르면

당시 복원을 하면서 아무런 전거 없이 마구잡이로 한 결과라는 보도가 있었다.

 

공포와 결구처리 방식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의 삼국시대 복고풍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계 건축이라고 보여 진다.

바닥과 주위에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방식인 검은 전돌을 깔았고 불상 위에 설치된 닫집은

고려 말의 다포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극락전 앞에는 우화루(雨花樓)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극락전을 해체 수리 하면서 봉정사의 부속암자인 영산암으로 옮겨가 버렸다.

(*위 내용은 인터넷 검색으로 네이버 카페 ' 서울학교'에서 인용한 자료임)

 

「國寶 第十五號 鳳停寺 極樂殿」표지석.

 

 

봉정사 삼층석탑

극락전 앞마당에는 까만 삼층석탑 한기가 서 있는데 자그마한 마당에 어울리는 규모이다.

석가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른 이중 기단에 3층 탑신의 석탑으로 상륜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1984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마당에는 여느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석탑·석등이 없고, 극락전 마당에 3.35m 높이의 3층 석탑 1기가 있다.

*삼층석탑이 대웅전 앞에 위치하지 않고, 극락전 앞에 있는 것은 극락전이 주불을 모시고 있어서라는 말도 있으나,

  아니면,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립 시대 차이일 수 있다.

*극락전 안에는 후불벽을 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셔놓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대웅전 우측으로 보이는 무량해회(無量海會)는 승려의 거주공간인 요사채(寮舍寨)로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 있다.

*요사채(寮舍寨)는 사찰 내에서 전각(殿閣)이나 산문(山門)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또한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산문(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는 일주문(一柱門)과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천왕문(天王門)과 둘이 아닌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 등을 말함

 

경내를 둘러보고.. 대웅전 앞마당 계단을 내려서는 모습들이.. 다리가 아픈 탓도 있지만.. 경로 세대 맞다 ㅎ

 

 

현재의 봉정사는 두 개의 중심 공간이 나란히 늘어선 구도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과 무량해회로 둘러싸인 응신불 석가모니불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의 뒷면과 고금당 앞면으로 둘러싸인 보신불 아미타불의 공간이다.

 

대웅전 공간이 여러 사람이 모여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고 예배를 볼 수 있는 집회의 공간이라면,

극락전 공간은 여러 사람을 위한 설법의 공간이 아니라 조용히 염불을 할 수 있는 개인 차원의

수행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 크지 않는 봉정사 경내를 구태여 두 영역으로 구분한 것은

화엄종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화엄강당을 지을 당시의 불교사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극락전을 품고 있는 봉정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사채를 지나 봉정사를 나서는 길목..

 

 

양지쪽이라 그런가? 매실나무에 매화의 꽃순이 돋는 듯이 보인다. *^^

 

 

진여 [眞如]

산스크리트어의 tathatā, tattva의 한자 번역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진실한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

'여'(如)라고도 번역된다. 즉 무상(無常), 무아(無我)하고 괴로운 것이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며,

연기(緣起)하고 있는 이 세계가 틀림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진여'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여 [眞如]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진여문(眞如門)으로 나서며.. 아쉬운 마음으로 봉정사 경내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

*공민왕 친필로 전하는 ‘진여문(眞如門)’ 편액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전통문화를 보기 위해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 두 곳을 방문했던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한 때문이다.

 

*당시 엘리자베스2세 영국여왕이 봉정사 방문시 둘러본 코스는.. 

 극락전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 영산암 지조암 삼층석탑 만세루 명옥대 등이다.

 

*영선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 영화를 보고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 

 

영선암은 봉정사의 요사인 무량해회에서 동쪽으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영산암의 '영산'이란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設)하시던, 인도 왕사성 근방에 있는 영축산을 말한다.

법화경을 설법하실 때의 그 모임을 일러 불교에서는 영산회상이라 이름하며 이 모임의 장면을 영산회상도라 하여

법당의 후불탱화로 많이 봉안된다.
봉정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덕휘루를 통하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대부분 이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에 동화되며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사립문을 지나 요사채 뒤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이곳까지 발길이 닿는다. 영산암의 출입문인 우화루 밑을 지나 암자의 안마당에 닿으면 고건축의 미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는 마당의 멋스러움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 

 

 

영국의 여왕이 다녀가기도 한.. 유서 깊은 천년사찰 봉정사(鳳停寺)를 내려오면서.. 만세루(萬歲樓)를 올려다본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퇴계 선생이 지었다는.. 명옥대(鳴玉臺)도 가보기로 한다. 

 

 

여기다.. 술잔을 띄우고 기생들과 한 잔 하던 곳 같다고 하는데.. 과연 풍광이 그럴 듯하다. *^^

 

 

이 건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顯宗) 6년(1665)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누각(樓閣)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으나, 육사형(陸士衡)의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

'飛泉漱鳴玉,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있으며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 경에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내진주(內陳柱)와 기둥 위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이 일부 상실되어 건축적 가치는 약하다.

맞은편 바위 표면에‘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 있다.

 

 

바위 측면에 鳴玉臺라는 암각문이 보인다. 臺란?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돈대, 墩臺)이나 바위 등을 이르며

또한, 무대(舞臺)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니.. 옛날 이곳에서 시조 등을 읊으며 멋진 무대를 연출했을 것 같다. ㅎ

 

 

※ 아래 명옥대(鳴玉臺) 안내문은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언제 이런 길을 걸어보냐며.. 앞장서자.. 모두들 따라간다. ㅎ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논두렁에서 보이는 멋진 전통찻집! (*Zoom 촬영)

 

 

한 친구가 전에 한 번 와 본 곳이라고.. 나무 판자에 "여보게 여기서 잠깐 쉬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글이 보인다. ㅎ

 

 

고목이 된 산수유나무에.. 붉은 산수유가 다닥다닥 많이도 달려 있다. *^^*

산수유나무는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소교목으로, 꽃은 황색이며,

타원형으로 생긴 열매가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8~10월에 붉게 익는다.

 

 

오줌싸개인가.?. 키를 쓰고.. 머리를 거꾸로 하여.. 뒤를 바라보는 모습이 웃긴다. ㅎ

 

 

목조 기둥을 보니 건축비가 많이 든 찻집 같고.. 다관, 다기 등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

 

 

그대 여기 머물러 보았네 못 보았네 말하지 말고 속진 번뇌 모두 벗어 놓고

솔바람 더불어 차나 한잔 들고가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속진(俗塵); 속세의 티끌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을 이르는 말.  

*번뇌([煩惱);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

 

 

 

진한 대추차 한 잔.. 말린 사과를 덤으로 듬뿍 준다. (*대추차 7천 원)

 

 

17:50 찻집을 나서는데.. 산기슭이라 벌써 어둠이 찾아왔다.

 

 

되돌아보니 아늑한 불빛을 그대로 밝히고 있다.

 

 

19:10 제천 도착, 어느 한식 뷔페식당에서 저녁 식사.. ㅎ

 

 

새해 첫날부터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세 끼 모두 해결하고.. 떡국까지 먹고..  20:00 제천 출발.. 20:30 영월 도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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