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랑의 '묏버들 가려 꺾어'

좋은 글 모음 2020. 12. 19. 20:30

묏버들 가려 꺾어는, 조선 선조 때 함경도 홍원(洪原) 출생 기생인 홍랑(洪娘)이

당시에 유명한 삼당시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이별할 때 지은 시조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戀詩).. 홍랑의 ‘묏버들 가려 꺾어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듸
자시난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 (현대어 풀이) -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가리다 : 어원 <희다<다<용가>  활용 가리어(가려)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구별하여 고르다.
*것거-디다 : 「동사」「옛말」 ‘꺾어지다’의 옛말.

*의손 : 조사  [옛말] ((끝음절의 모음이 ‘ㅏ, ㅗ’가 아닌 체언류 뒤에 붙어))에게.

*밧곁 : 「명사」「옛말」 ‘바깥’의 옛말. (*창밧긔 → 창밧-게 → 창밖에)

*-긔 : 어미  [옛말] ((주로 동사, 형용사 어간이나 어미 뒤에 붙어))-게.

*곳 : 조사  [옛말] ((체언류 바로 뒤에 붙어))‘곧’의 옛말.

 (*옛말 풀이 : 네이버 국어사전, 우리말샘 참조)

 

*위 현대어 풀이는 영월박삿갓 개인적인 해석이므로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음.

 

*단아한 필치인 '홍랑 시조 원문' 

 (*홍랑의 글은 이 시조 1수만 전해진다)

*'홍낭' : 홍씨 성을 가진 낭자(娘子)라는 뜻으로 이름은 없음.

 (*홍원 아가씨라는 뜻일 수도 있음.)

 

 

최경창은 1573년(선조 6년)에 34세의 나이로 함경도 경성(鏡城)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였으며,

홍원부사가 마련한 취우정 자리에 불려 나온 홍랑이 시를 읊는데, 그 시는 바로 고죽 최경창의 시였다.

 

그러나 홍랑은 부임해온 사람이 최경창인 줄 몰랐고, 자신이 고죽이라고 밝힌 최경창과 사랑에 빠진다.

홍랑은 방직기(房直妓)를 자원하고, 경성(鏡城)의 막중(幕中)에서 6개월 정도 함께 기거하며 정을 쌓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관직이 바뀐 최경창이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최경창과의 이별을 애석해하며 읊은 시조가 '묏버들 가려 꺾어'이며, 홍랑의 나이는 열여덟 쯤이었다. 

 

최경창이 한양으로 갈 때, 함경도 경계인 쌍성(雙城)까지 따라가지만 관기인 홍랑은 더 갈 수 없었다.

쌍성(雙城)에서 작별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녀의 시를 받은 최경창은 붓을 둘어 새 종이에 옮겨 쓰고 한문으로도 번역해 그녀에게 보냈다.

편지는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선조 9년)에 홍낭에게 보낸 것이다.

 

북도평사로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벼슬살던 최경창이 그곳에서 사귀었던 기생 홍낭과 헤어질 때의 심정,

자신이 병들었을 때 7주야를 걸어 찾아왔던 홍낭의 열정, 그로 인해 면직당한 당시의 사연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만력 계유(萬曆癸酉.1573년) 가을 북도평사로 부임했을 때 홍낭도 막중(幕中)에 있었소.

다음해 내가 서울로 올라올 때 홍낭이 따라와 쌍성(雙城)에서 이별했소. 헤어지기 전 함관령(咸關嶺)에 이를 적에

날이 어둡고 비가 캄캄하였소. 그때 그대는 나에게 노래 일랑을 주었소. 그 뒤 소식이 끊어졌소.

을해년 내가 병을 앓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을 때 홍낭은 이를 듣고 칠주야를 걸어 서울에 오지 않았소.

그때는 함경도 사람이 서울에 오지 못하게 금령(禁令)이 내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하매

나는 면직되고 그래서 홍낭은 고향으로 가지 않았소…”

 

병자년 여름 고죽병인(孤竹病人)이라 보낸 이를 밝힌 이 편지는 홍낭이 이별할 때 읊조렸던 시도 함께 적어 놓고 있다.

홍낭은 편지와 최경창의 시고(詩稿) 등을 간직하였다가 최경창의 문중(門中)인 해주(海州) 최씨가(崔氏家)에 전하였다.

 

 

*북도평사(北道評事) : 정육품(正六品) 외직 문관으로 병마절도사의 부관인 관직명.

 원명은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병마절도사 밑에서 문부(文簿)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방직기(房直妓) : 변방의 군관은 가족을 데려가지 못하고, 대신 수발을 드는 관기.

 

*홍원(洪原) : 지금의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으로, 함흥 북쪽 동해변에 접하여 있다.

*경성(鏡城) : 부(府) 이름.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경성군(鏡城郡) 지역에 있었다.

 고려 때부터 여진족 등의 침입을 막는 국방의 요지(要地)로 많은 군대를 두고 있었다.

*쌍성(雙城) : 영흥(永興 · 和州)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함경남도 남부의 금야군.

 동쪽은 동해, 남쪽은 고원군(高原郡)과 강원도 천내군(川內郡)이 접하여 있다.

*함관령(咸關嶺) : 함흥 70리 밖의 홍원군과 함주군(현 함흥시) 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450m
 예부터 북동쪽에서 함흥(咸興)으로 들어오는 관문(關門)이라는 뜻에서 함관령이라 하였다. 

*兩界의 禁 : 중국과의 접경인 함경도와 평안도의 주민은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禁令.

 

 

최경창 [崔慶昌]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5)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경창 [崔慶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이 한양에 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당하였고, 홍랑은 나라의 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제수되었으나, 다시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마흔다섯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종성(鐘城) : 함경북도 종성군으로, 중국 간도 지방과 접하고 있으며, 두만강(豆滿江) 우안에 있다.

 

1583년(선조 16) 음력 3월 최경창이 죽자, 묘를 찾아간 홍랑은 용모를 흐트리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와 유품을 챙겨든 홍랑은 함경도 홍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전쟁이 끝나기까지의 7년 동안 그녀의 행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고죽의

시와 문장이 담긴 '고죽집孤竹集'이 전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유고를 생명처럼 여긴 홍랑 덕분인 것이다.

 

전란 후 다시 최경창의 묘소를 찾은 홍랑이 묘 옆에서 죽자, 최씨 문중은 최경창의 묘 아래 묻어주었다.

고죽(孤竹) 최경창이 쓴 편지는 4백여 년만에 발견되었다. 후손인 최원부(崔元簿)옹이 소장해 온 것이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위치한 해주 최씨의 문중 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부부 합장묘 

바로 아래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이곳이 홍랑(洪娘)의 무덤이며 묘 옆 시비에 이 시조가 새겨져 있다.

 

최경창 부부 합장묘와 홍랑 묘 아래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고죽시비(孤竹詩碑)의 앞면에는,

홍랑의 시를 최경창이 한문으로 번역한 '번방곡'과 이에 대한 사연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고죽시비(孤竹詩碑) 뒷면에는 홍랑의 시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

 

 

천일야사 102회 기녀 홍랑의 지독한 사랑 (20181203)

 

 

고대 중국에는 연인과 헤어질 때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折柳) 즉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은 생명력이 강해 꺾어준 버들을 심어두면, 쉽게 뿌리를 내리고 새잎을 피우는데,

이처럼 자신들의 사랑도 시들지 말고, 곧바로 다시 만나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절류(折柳)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뜻으로, 배웅하여 이별함을 이르는 말. 옛날 중국의 장안 사람이

손님을 배웅할 때에 버들가지를 꺾어 주며 재회를 기약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이와 같은 절류(折柳)의 풍습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한대(漢代)부터

정인(情人)과 이별을 나눌 때 버들가지를 꺾어서 상대방에게 주는 습속이 있었는데

특히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장안(長安) 교외에 있는 파교(灞橋)의 다리목에는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이 이별을 아쉬워하는 석별의 명소였다고 한다.

한나라 때의 지지(地誌) 《삼보황도(三輔黃圖)》에는 "고을사람들이 손님을 보낼 때에는

이 다리에 이르러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바람에 휘날리고 눈비를 맞고 있는 파교의 버드나무(灞柳風雪)"는

장안팔경(長安八景)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버드나무와 절류지(折柳枝)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灞陵 : 秦나라 穆公이 서쪽 異民族을 정복한 기념으로 滋水라고 부르던 강을 灞水라고 고치고

강을 따라 십리 거리에 빽빽이 버드나무도 심었다. 또 장안 동쪽 灞水 위에 다리를 놓아 灞橋라 했는데

離別場所로 유명하다. 이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어 灞橋折柳=灞陵折柳라 한다.

또 灞水 가에 西漢文帝 劉恒(BC202~BC157)의 묘가 있어 灞陵이라 한다.

[출처] 李白: 灞陵行送別(744年) – 파릉(灞陵)을 노래하여 헤어지며

 

 

 

영월 장릉 한골 입구에 자란 '묏버들'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수양버들과 달리 묏버들은 나무가지가 밑으로 늘어지지 않고 곧게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

 

 

한골에 있는 버드나무는 가지가 늘어진 수양버들도 아니고, 굵은 나무에 '갯버들' 명패가 보인다.
그런데 '갯버들'은 물가에서 많이 자라며, 높이 2∼3m 정도로 뿌리 근처에서 가지가 많이 나온다.
갯버들의 꽃봉오리는 추울 무렵 일찍 나오는데, 꽃눈을 싸고 있는 것을 '버들강아지'라고 부른다.

 

 

산버들 꽃은 암수딴그루로서 묵은 가지의 잎겨드랑이에 미상꽃차례로 달리는데, 봄철에 잎보다 먼저 핀다.

 

 

*미상꽃차례 catkin 비교적 부드러우며 가늘고 긴 수상꽃차례에 단성화가 달리며 밑으로 늘어지는 꽃차례

 

 

시조에 '묏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뫼는 묏 산(山), 버들은 버드나무이니 '산버드나무'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골에 높이 자란 버드나무는 '갯버들'이 아닌 산에 사는 '산버들' 같다.  

 

갯버들 쌍떡잎식물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의 낙엽활엽 관목.
포류(蒲柳)·수양(水楊)·세주류(細柱柳)라고도 한다. 강가에서 많이 자란다. 높이 1∼2m이고

뿌리 근처에서 가지가 많이 나오며 어린 가지는 노란 빛이 도는 녹색으로 털이 있으나

곧 없어진다. 겨울눈()에는 적색 비늘조각()이 모자처럼 덮여 있다.

 

산버들 쌍떡잎식물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의 낙엽활엽 소교목.  
유가래나무라고도 한다.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 2∼5m, 지름 5∼10cm이다. 작은 가지에 털이 없다. 

잎은 긴 타원 모양이거나 타원 모양이고 길이 3∼10cm, 나비 약 4cm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버들 (두산백과)

 

*관목(灌木 shrub) 키가 작은 나무, 가지를 많이 치는 특징이 있으며, 덤불성이기도 하다.
*소교목(小喬木 small-tree) 교목보다 작고 관목보다 큰 나무. 중선키나무라고도 한다.
*교목(喬木 arbor) 높이가 8m를 넘는 나무. 수간(樹幹)과 가지의 구별이 뚜렷하다.

 

 

식물명 : 유가래나무 [비추천명 : 산버들]

분류군 : 버드나무과 (Salicaceae) 영문 Glabrous beak willow

형 태 : 낙엽활엽교목 또는 관목상이다
높이 2-5m, 지름 5-10cm이며 일년생가지는 녹색이고 털이 없다.
특 징 : 여우버들에 비해 햇가지와 잎에 털이 없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홈페이지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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