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수 있다면 / 어느 장애인의 글에서

좋은 글 모음 2015. 12. 28. 11:00

걸을 수 있다면

 

섬진강 고운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

힘들었던 지난날들을

따스한 작은 모래알로부터

발가락 구석구석을 위로받고 싶다

 

봄바람 불어

무더기 들판 보리가 파도를 칠 때

나비와 친구되어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다

 

비 갠 아침

철쭉이 수분을 먹음고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생된장에 도시락 하나 짊어지고 산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철쭉꽃을 정원 삼아

금방 딴 곰취에

맛있는 점심을 먹어보고 싶다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는 날

두 다리로 벌리고 목석같이 서서

그동안 쌓인 분노와 아픔을

비로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오후

아무도 걷지 않은 산길을

속세를 떠나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을 밟으며

내가 남긴 선명한 발자국에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

 

어느 장애인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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