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낙화암(落花巖)과 민충사(愍忠祠)

박삿갓의 여행 이야기 2023. 10. 14. 10:00

낙화암((落花巖)은 금강정 쪽 동강의 높은 절벽 위에 있는데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이곳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
이들이 투신 순사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두 곳의 낙화암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의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부여의 백마강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곳 영월의 낙화암이다. 금강정 절벽에 동쪽으로 있는 마지막 절벽이 낙화암이다.

단종이 복위된 후 영조18년(1742년) 영월부사 홍성보(洪性輔)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일대 절벽 위쪽에
‘낙화암’이라는 비석을 세웠으나 일제 때인 1910년 일본인들이 비석을 파괴해 강물에 버렸고
 2년 뒤 당시 영월군수 이석희씨가 다시 세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낙화암’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여년간 지역 단종관련 유적들을 관찰해온
엄태일(71세)에 의해 낙화암 암각 글자가 발견되면서 정확한 장소를 알게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낙화암 비석은 1924년에 세웠다.
1726년 영월부사를 지낸 윤양래의 탁본첩에 있는 남화암 비석은 금장강 물속에 잠겨있다.

(전면)落花巖
(후면) 碑文
端廟朝諸侍女及諸從人 同日投水殉節 英宗戊寅 愍忠祠賜額 英宗壬戌知府洪聖輔 始立碑刻落花巖三字 隆熙庚戌夏 碑頭半落沉水 同年冬有何不良之人 投碑于水忍不可言 今玆本郡守李錫僖·保勝會長池昌永 詢謀僉同 上報李王 特蒙激勸之恩允 不日告功 立于舊址爾

甲子 參月 日
本郡守 李錫僖
保勝會長 池昌永
石工 李聖心

▽▽▽ 후면 비문 해석▽▽▽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같은 날 (동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영종 무인(영조 34년, 1758)년에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이보다 앞선 영종 임술(영조 18년, 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융희 경술(1910)년 여름에 비석 머리 부분 절반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았는데, 동년 겨울 어떤 못된 부랑자가 나머지 비석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본 군수 이석희(李錫僖) ‧ 보승회장 지창영(池昌永)이 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이왕(李王)에게 보고를 올리고, 특별히 격려하는 윤허를 받은바 힘입어, 얼마 아니 되어, 일을 모두 마치고, (낙화암)옛터에 비를 세우게 되다.

갑자(1924년) 三月 日
본 군수 이석희
보승회장 지창영
석공 이성심

영월 낙화암[ 寧越 落花巖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39번지 금강공원 내에 있는 절벽으로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이곳에서 투신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端宗)이 1457년(세조 3) 10월 24일 17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와 시종들이 이 절벽에 올라
금장강(錦障江, 동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의 시신도 이곳에서 강으로 던져졌다 한다.

1742년(영조 18) 낙화암 근처에 사당 민충사(愍忠祠,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7호)를 지어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당시 영월부사 홍성보(洪性輔)가 절벽 위쪽에 ‘낙화암(落花巖)’이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은 1910년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고,
현재의 비석은 1912년 다시 세운 것이다.

금강공원의 금강정(錦江亭,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에서 동쪽으로 약 200m 거리에 비석이 놓여 있다. 한편 2008년에 비석과
금강정 중간 지점의 절벽 약 10m 아래 지점에서 ‘낙화암’이라 새겨진 오래된 암각문이 발견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낙화암 [寧越落花巖] (두산백과)

금강정(錦江亭)과 낙화암(落花巖)으로 이어지는 깎아지른 절벽(병창)!

낙화암으로 가는 길에 테크를 만들어 다니기는 편하지만, 절벽이 보이던 옛적 풍경이 사라진 점이 아쉽다.
아래에 테크를 만들기 전의 낙화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수집하여 몇 장 더 올려본다,

*예전에는 금강정을 조금 지나면.. 바위 절벽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낙화암 아래 강가로 내려가는 좁은 비탈길이 있었음. 

*겨울이면 강물이 얼어붙어 스케이트장이 형성되었고.. 얼음판 위로 강을 건너 덕포 마을에 놀러 다니기도 했음.

※ 아래는 낙화암 부근 절벽(영월 말로 뼝창)에 '落花巖'이라 새겨진 암각문으로,
   글자 한 자의 크기가 가로 X 세로 약 1m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 자료)

▼ 1742년(영조 18)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가 낙화암 절벽에 새긴 ‘落花巖’ 세 글자

▼ 1746년 (영조 22)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창렬암(彰烈巖)이라는 암각문 세 글자를 낙화암 암벽(巖壁, 병창)에 더 새겨 넣었다고 한다.

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彰烈巖記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彰烈巖記 / 洪直弼

▽▽▽ 기문(記文) 해석 ▽▽▽

창열암기 (창렬암에 대한 기록)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켜켜이 쌓인 울분이 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나는 영월에 와서 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위로 올라가 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한참동안 배회하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아! 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당시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궁녀의 경우는 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묘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어지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아아! 끝없는 우환일지라도 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종묘에 모셔졌고, 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여러 임금께서 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창렬암기 / 홍직필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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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암(落花巖) 비석 옆에 세워진 순절비(殉節碑)는 1955년(단기 4288년) 11월 당시 영월면장과 면의원 일동이 건립한 것이다.

순절비(殉節碑)

(전면)殉節碑
(후면)
李朝 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體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
寧越面長金南圭 面議員一同
檀紀四二八八年十一月 日 建立

▽▽▽ 비문 해석 ▽▽▽

(순절비 후면)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도다.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구지(舊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영월면장 김남규 면의원 일동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민충사[ 愍忠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금강정 바로 위쪽에 있음)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정(錦江亭) 뒤편에 있으며,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낙화암(落花岩)에서 몸을 날려 사절(死節)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단종이 처참하게 승하하자 여섯 시녀와 시종 한 사람은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대왕님이 가셨는데 우리는 살아남아 무엇하겠느냐」 하고 금강정으로 뛰어 올라가서
그 옆의 언덕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꽃잎같이 투강 순절 하였던 것이다.

그 시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궁녀 宮女 : 자 개 者 介
관비 官婢 : 아가지 阿加之
궁비 宮婢 : 불 덕 佛 德
무녀 巫女 : 용 면 龍 眠 , 내은덕 內隱德 , 덕 비 德 非

한 사람의 시종 이름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묘소는 낙화암 바로 뒤에 있다.

시녀들이 낙화암에서 순절하자 단종 혼령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시고 낙화암을 돌아 보셨는데,
강물은 깊어 검푸르고 파도는 드높으매 「나는 왕손이기에 수난을 당한다고 하겠으나 너희들이야
무슨 죄로 이지경이 되어야 하겠느냐」하시면서 탄식하였다는 전설이다.
* 이상 내용은 "영월을 찾아서( 박영국 엮음, 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자료 참조

문이 굳게 닫겨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 너머로 보이는 민충사 사당의 모습..

* 단종의 시녀와 시종들을 기리는 민충사 *

1457년(조선 세조 3)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낙화암에서 강물로 몸을 던져 그의 뒤를 따랐는데,
민충사는 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시녀와 시종들이 투신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그 장소를
낙화암이라 부르며,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건물은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려 단청이 퇴색하고 낡았다. 이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곧 낙화암 절벽이 나온다.
영월읍민들은 여섯 시녀의 충혼을 기리는 순절비를 세우고 뒷면에 역사적 사실을 음각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 민충사의 유래와 역사 *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1457년(세조 3)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등된 후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영월에서 1457년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을 모시던 시녀 6인도 낙화암에서 금강에 몸을 던져 사절하였다.
이에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1742년(영조 18)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1758년(영조 34) 육신창절서원(六臣彰節書院)을 보수할 때 사우를 중건하였고, 다시 1791년(정조 15)에 개축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24일 제사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충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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