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금강정(錦江亭)

박삿갓의 여행 이야기 2023. 10. 12. 10:25

금강정은 조선 세종 10년(1428) 김복항이 세웠다고 전해오나, 영월제영에 따르면 이자삼이 영월군수로 있을 당시
금강(錦江, 현재의 동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빼어난 지 조선시대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대학자인 이퇴계도 금강정에 이르러 금강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또한 우암 송시열도 숙종 10년(1684)에 이곳에 들려 「금강정기」를 남기기도 했다.

금강정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금강정(錦江亭)은 낙화암 밑으로 흐르는 동강 위로 붉은 단풍잎이 어리어 마치 한 폭의 비단 같아 보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금강정은 영월 8경 가운데 금강추월(錦江秋月), 태화단풍(太華丹楓), 계산숙무(稽山宿霧), 봉소귀범(鳳沼歸帆)의 4 경을
모두 볼 수 있는 동강의 빼어난 전망대다.

금강추월(錦江秋月) 금장강(錦障江, 동강) 언덕 위의 금강정(錦江亭)에 팔월 한가위 달빛이 비친 밤경치(밤경치)
태화단풍(太華丹楓) 영월의 노적봉(露積峰)이기도 한 웅장한 태화산(太華山)의 아름다운 5색의 단풍경치(가을경치)
계산숙무(稽山宿霧) 금강산 봉우리 같은 계족산(鷄足山)이 안갯속에 솟아보이는 아침경치(아침경치)
봉소귀범(鳳沼歸帆) 동서강 합수처인 금봉연(錦鳳淵)에 서울 왕래 뱃길에서 돌아오는 돛단배가 어울리는 경치(강상경치)

금강정(錦江亭)에서 동강대교 하류 쪽이 동, 서강 합수처인 합수거리로, 옛날에는 한양까지 가는 뱃길이 있었다고 한다.
금봉연(錦鳳淵))은 동강과 서강이 합치는 합수거리에 있으며, 강 건너 팔계 쪽의 검각산 병창 밑에 있는 푸른 소(沼)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태화산(太華山)으로, 영월군과 충북 단양군이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남한강이 산자락을 휘감아 흐른다.
계족산은 금강정에서 강 건너 쪽으로 보이는 산으로 그 형상이 닭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계족산(鷄足山)이라고 부른다.

금강정(錦江亭) 강원문화재자료 제24호.

1428년(세종 10)에 김복항(金福恒)이 세웠다고 하나 영월제영(寧越題詠)에 의하면 이자삼(李子三)이 영월군수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금강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강정」이라는 시(詩)도 전하고 있다.
한편,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1684년(숙종 10)에 금강정에 주위로 펼쳐지는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

건축형식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출입하는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는 머름이 둘러져 있다. 정자 안에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친필인 ‘금강정(錦江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역사적 변천
김복항(金復恒)이 세운 이후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1969년과 1976년에 단청을 다시 칠하는 등의 부분 보수를 하였다.

주위에는 낙화암(落花岩)·민충사(愍忠祠)·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의의와 평가
금강정 아래로는 푸른 동강이 흐르고, 그 앞에는 계족산과 태화산이 자리하여 영월 8경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금강정 주위에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대유학자들의 방문과 기록이 이어진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허준구의 신(新)한시기행 37 영월 금강정」(『강원도민일보』 2004년 11월 23일자)
[네이버 지식백과] 금강정 [金剛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금강정(錦江亭)은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정(錦江亭) 편액의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錦江亭 退溪 李 滉

鵑啼山裂豈窮年。
蜀水名同非偶然。
明滅曉簷迎海旭。
飄蕭晩瓦掃秋烟。
碧潭楓動魚游錦。
靑壁雲生鶴踏氈。
更約道人攜鐵笛。
爲來吹破老龍眠

鵑啼山裂豈窮年。 蜀水名同非偶然。
두견새 울어 산을 무너뜨리니 어찌 세월 모자랄까.
촉나라 물 이름(錦江) 같은 것도 우연은 아니로다.

明滅曉簷迎海旭。飄蕭晩瓦掃秋烟。
깜빡 깜빡 새벽 처마끝으로 바다 일출 맞이하고,
우수수 저녁 기왓장에 가을 연기 쓸어가네.

碧潭楓動魚游錦。靑壁雲生鶴踏氈。
푸른 못 위에 떨어진 단풍잎 움직임은 고기가 비단 위에 노는 듯하고,
푸른 벽에서 생기는 구름은 학이 양탄자 밟는 듯.

更約道人攜鐵笛。爲來吹破老龍眠。
다시 도인과 언약하여 쇠로 된 피리 들고서,
피리 불어 늙은 용의 잠을 깨어 나오게 하세.

※ 1573년에 간행된 퇴계집(退溪集)의 자료라고 하는데.. 문집별로 시(詩) 해석이 조금 다르다.

錦江亭(금강정) 退溪 李 滉(퇴계 이 황)

鵑啼山裂豈窮年   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는 어찌 한 평생 산이 찢어져라 우는지?
蜀水名同非偶然   촉수명동비우연     촉나리의 강 이름도 한 가지라 우연이 아니구나.
明滅曉簷迎海旭   명멸효첨영해욱     큰 아침 해를 맞으니 가물거리던 처마가 다가오고,
飄蕭晩瓦掃秋烟   표소만와소추연     낡은 기와를 칠하듯 가을 안개 쓸쓸히 나부끼네.
碧潭楓動魚游錦   벽담풍동어유금     단풍나무 흔들리는 푸른 물가엔 아름다운 물고기 노닐고
靑壁雲生鶴踏氈   청벽운생학답전     구름이 이는 푸른 절벽엔 학이 융단을 밟고 있네.
更約道人携鐵笛   갱약도인휴철적     도인과의 약속을 바꿔서 날라리 들고서,
爲來吹破老龍眼   위래취파노룡안     남김없이 다 불어 잠자는 늙은 용을 돌아오게 하리라.

※ 출처 : 退溪集(퇴계집) 退溪先生文集券之一(퇴계선생문집권지일) 시(詩) 1943년 간행본 인용

금강정(錦江亭)은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밑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1428년(세종10년)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세웠고 그 뒤로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동으로 금장강에 접해 있고 남으로 금봉연(金鳳淵)이 자리잡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장강 밖으로 상덕촌(尙德村)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밀적포(密積浦)가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정자 바로 곁에 단종이 죽자 시녀 여섯 명과 한 명의 시조이 몸을 던져 죽은 낙화암(落花岩)이 있으며, 정자 뒤편으로 민충사(愍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자에서 영월 8경 중 4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鵑啼山裂豈窮年 (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 울어 산을 찢어내니 어느 해에 그치려나?,
蜀水名同非偶然 (촉수명동비우연)     촉과 강 이름 같음도 우연이 아니어라.,
明滅曉簷迎海旭 (명멸효첨영해욱)     달빛 꺼져 가는 새벽 서까래에 아침해 떠오르고,,
飄蕭晩瓦掃秋烟 (표소만와소추연)     나부끼는 대 숲에 저녁의 가을 연기 사라진다.,
碧潭楓動魚游錦 (벽담풍동어유금)     맑은 못에 단풍 흔들리니 물고기 비단에서 헤엄치듯,
靑壁雲生鶴踏氈 (청벽운생학답전)     하늘에 구름이니 흰 학이 양탄자를 밟는 듯,,
更約道人携鐵笛 (갱약도인휴철적)     다시 도인과 쇠피리 가져다가,,
爲來吹破老龍眼 (위래취파노룡안)     쇠 피리 불어 늙은 용안을 뜨게 하자 약속하네.,
<이황(李滉), 錦江亭>

시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로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러 지은 듯하다. 시인은 단종의 비극적 삶을 두견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시의 서두를 열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예사롭지 않아 산을 찢어내고 있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그 두견이와 연결된 촉나라의 강(錦障江) 이름과 같다고 하여, 단종의 애처로운 역사적 사실을 중국의 역사와 닮은꼴임을 드러내어 그 슬픔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간다. 달빛 희미해 질 때 아침해는 어김없이 지붕의 서까래 위로 떠오르고, 다시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고 가을의 저녁 마을 연기는 비로 쓸어낸 듯 사라진다. 이는 무한히 시간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아침과 저녁이라는 시간의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 다음 5, 6구절에서는 회화적 수법을 통해 정자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표현하였다. 정자 아래의 맑은 강으로 흔들리는 오색의 단풍나무 잎들이 마치 물고기가 비단에서 헤엄치 듯 한다고 하여, 실제 물고기의 움직임과 단풍나무 잎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섞어놓고 있다. 또한 하늘에 흰 구름 일어나는 것을 흰 학이 양탄자를 사뿐사뿐 밟으며 날아가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퇴계 선생의 뛰어난 회화성의 일면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마지막 7, 8구절에서는 도인(道人)과의 약속을 통해 나이가 들어 이치를 바라보는 시각의 무딤을 쇠피리 소리를 통해 일신해 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도학자다운 끝맺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청연서당>

※ 출처 : 강원도민일보 문화 연재(2004. 11. 23) 게재 내용 (* 인터넷 검색)
    [허준구의 新한시기행] <37> 영월 금강정(錦江亭)

宋子大全卷一百四十四
寧越郡錦江亭記a_113_108b

李侯子三。嘗立朝正言。廢錮累年矣。旣而時事更新。群賢彙征。而侯又抹摋於時世。與君平相棄之矣。侯性好山水。聞寧越有蓬萊,太華,會稽,錦江之勝。悠然有句漏之興。求出爲郡守。其江山淸趣。果愜宿願。而所謂錦江亭者。老而支拄。殆不可徙倚矣。遂割淸俸。將以新之。則監司魚侯翼之聞而嘉之。亦助事力。未幾而良構屹然改觀。則以上諸山。擧入於拄笏之中。而十里淸流。映帶乎憑檻之外矣。侯樂其地僻事簡。日哦其間。蓋屋未就。而詩已成矣。夫江山之名。固有不約而冥會者。人之覽之者。因之而起其遐想焉。然113_108d今蓬萊之上。未必有不死之藥。太華之顚。未必有十丈之蓮。而會稽之下。亦豈有芰荷之水乎。惟所謂錦江者。是蜀中之水。而屢形於草堂之詩。無亦有冤禽之啼血乎。月白山空。如聞其一二聲。則侯必悽然而泣下。不覺淸興之翻成感緖矣。未知侯果然否。聊以書問之。

※ 출처 : 한국학자료포털 > 학국학자료DB > 고문서

금강정기(錦江亭記, 국역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부사 이자삼은 일찍이 정언으로 조정에 나아갔으나 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하였다. 이후 다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조정으로 나아가 군평(君平)과 더불어 시세를 없애버리고 서로 포기하였다. 이무는 산수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는데 영월지방에 봉래(蓬萊), 태화(太華), 회적(會積), 금강(錦江) 등의 명승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연스레 시구(詩句)가 일어나 영월군수가 되어 부임하기를 원하였다. 그곳의 강산이 맑게 비치니 과연 바라던 바와 일치하였다. 이른바 금강정은 늙은이의 지주가 되니 잠시동안 배회할 곳은 아니다. 더군다나 깨끗함을 받들어 장차 새롭게 하니 감사 어진익(魚震翼)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또한 힘을 보태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자를 완성하여 새롭게 보인 즉 모든 산들이 기둥사이에 있고 10리의 맑은 강물은 담 밖에 의지하여 비추는구나!
 이무(李堥)는 그곳에서 잘못된 일들을 간결하고 옳게 처리하니 모든 집들이 취하지 아니함에도 시(詩)를 지으며 성취하였다. 무릇 강과 산의 이름은 진실로 약속된 바가 아니라 가만히 있으며 깨닫고 사람들이 이를 봄으로 인해서 그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봉래산 위에는 반드시 불사지약(不死之藥)이, 태화령에는 10장(丈) 연(蓮)이, 회적산 아래에는 또한 어찌 지하(芰荷)의 물이 있지 않겠는가? 오직 금강이라고 함은 제기(祭器)안의 물과 같으며 초당의 시에 여러 형태로 보이니 또한 어찌 원한 맺힌 금수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월백산이 공허하니 한 두 가지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즉 이 무는 반드시 처연하게 슬퍼하면서 맑음이 번성하는 감정을 깨닫지 못함이라. 이무(李堥)는 과연 서문(書問)에만 의지하지 않았는가?   

영월 덕포 제방 둑(堤)에서 동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금강정(錦江亭)

※ 아래는 1968년 고교시절에 친구와 함께 금강정으로 놀러 갔던 사진으로, 당시는 소나무 아래로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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