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사를 간직한 청령포(淸泠浦 )

박삿갓의 여행 이야기 2010. 12. 12. 13:38

육지속의 작은 섬 청령포(淸泠浦 )는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16일 명승 제 50호로 지정되었다.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 쌓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청령포에는 영조2년(1726)에 세운 금표비(禁票碑)와 영조39년(1763)에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가 서 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오랫만에 청령포를 찾아.. 나룻배를 타고 건너간 서강 자갈밭.. 
강물에 수제비를 띄우는 모습을 보니.. 젊은 시절 친구들과 강물에 돌을 던지던 놀던 생각이 난다.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서자.. 진한 솔향이 풍기며 마음까지 맑아진다. 

단종어소는 승정원 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유배생활의 흔적을 더듬으며... 단종이 머물던 본채로 들어가 본다.  

본채 집안에는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본채 왼쪽으로 붙어 있는 행랑 마당을 돌아 집 뒤쪽으로 가 본다. 

담장 너머로 보니.. 모 방송국에서 단종어소의 모습을 담느라.. 잠시 마당안이 한적해진 모습이다.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으로 들어가 본다. 

행랑채 마당을 지나.. 청령포 철교가 보이는 소나무 숲 뒤 쪽,
흐름을 멈춘 듯한 강물위로는 황새 한 마리가 단종의 슬픔을 아는 듯 소리없이 날으고... 

조용항 숲 속 한 그루 소나무 아래에 피어 있는 붓꽃마저 애잔한 모습이다.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잇다는 관음송은 1988년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워 왔다. 

소나무의 크기는 높이 30m,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고,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6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 뒤산 육육봉(六六峯)과 노산대(魯山臺) 사이 층암절벽위에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에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은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라고 한다.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되여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자주 올라가 생각에 짐기곤 했던 장소라하여
지금까지 노산대(魯山臺)로 불리워지고 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 거송들이 들어찬 청령포수림지 중심에 위치한 단묘재본부시유지는
1763년 세워진 것으로총 높이 162cm 크기의 오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앞면에 「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이 이곳에 계실때의 옛터이다)」라는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 있고,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각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금표비가 있다. 

금표비는 단묘재본부시유지 북쪽에 있으며, 앞면에는「淸泠浦 禁票」라고 쓰여져 있고,
뒷면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崇禎九十九年(동서로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숭정 99년)」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소나무 숲을 나오는 길가에도 함초롬한 붓꽃의 꽃봉우리가 보이고.. 

청령포를 떠나며...  강물 속에는 송림의 그림자와 함께 슬픈 역사가 어리고 있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