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영주 부석사

특집 할아버지 어디가? 2016. 5. 22. 15:55

부처님오신날 오후 손녀와 함께 몇 십 년 만에 영주 부석사를 다녀왔다.

전날 봉축전야제는 봉화 축서사에서 참배하고 오늘은 영주 부석사다.

자외선이 강한 날이라 선글라스까지 같이 쓰고.. 덩달아 신이 났다. ㅎ  

 

 

부석사 [ 浮石寺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浮石寺] (두산백과)

 

 

돌계단을 올라가다.. 개미 한 마리 발견! 그냥 못 간다.

 

 

매표소 앞에서 잠시 쉬며..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라 매표소도 닫겨 있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ㅎ

* 참고로 입장료는.. 개인 1,200원(단체 30명 이상 1,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800원임.

 

 

간식을 먹으면서도.. 이것저것 관심이 많다.

 

 

매표소를 지나서 길을 따라 어느 정도 가면 ‘太白山 浮石寺’라는 현판이 걸린 훤칠한 일주문이 나온다.

부석사가 앉은 곳은 봉황산(鳳凰山) 자락이지만 봉황산은 크게 보면 태백산(太白山)의 한 봉우리이니,

부석사는 태백산 품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

 

 

어떻게.. 아빠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 살 빼려면 가끔 와야겠다. ㅎ

 

 

오랜만에 모녀가 같이.. 아이스커피까지 사 들고.. 천하태평이다. *^^

 

 

기분이 업되어 날아갈 것 같다.

 

 

경내로 들어가는 천왕문(天王門)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을 거쳐야 사찰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고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천왕문 양쪽으로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는데,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면서도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1980년에 새로 마련한 이 천왕문과 사천왕은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막 뛰어다니느라.. 무서운 사천왕 할아버지는 못 보고.. 천왕문을 지나왔다. ㅎ

 

 

 오늘 날씨도 더운데... 좀 천천히 좀 다니자.. 아빠 땀난다.

 

 

천왕문과 범종루 사이에 동서로 세워진 쌍둥이 탑으로 쌍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

삼층석탑 쌍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 탑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크기만 약간 다를 뿐 형식은 같아서,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 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움을 실었다. 꼭대기에는 후에 보충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부석사 첫번 방문 인증샷.. 당사자인 손녀는 별 관심이 없고..

 

 

개미 관찰이 더 재미있다.  

 

 

사진 찍는 걸 의식하자, 누각 기둥에 기대어 멋진 포즈를 잡는다. *^^

(* 이하 사진은 디카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스마트폰으로 찍음)

 

 

워킹도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닮아.. 수준급(?) 모델이다. ㅎ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하늘도 맑고.. 날씨도 좋고.. 절 마당에서 보이는 소백산맥의 전망도 그만이다. ㅎ 

 

 

축서사에도.. 부석사에도.. 수많은 연등이.. 와~ 예쁘다..

 

 

엄마도 올라오고.. 만세~ 기분이 최고로 업됐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무량수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로 늠름하면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몇 십 년 전.. 젊은 시절에 직장 동료들과 와 보았던 곳이다. 오랜 세월 지나고 나서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시 서 본다. ㅎ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浮石은 의상대사가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자

선묘 신룡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위다.

 

 

마당에 기어다니는 개미 등 벌레를 관찰하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긴다며.. 웃긴다. ㅎ

 

 

그러다가도.. 합장을 하고 참배하는 모습은 제법.. 불자 같다. *^^ 

 

 

손을 모은 채로 부처님께 정중히 인사 올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 나 잘 했지? 하는 표정으로 씩 웃는다. ㅎ

 

 

 ‘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아미타여래(阿彌陀佛,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님으로,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니 ‘무량수전’이 되는 것이다.

 

아미타불 [阿彌陀佛]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미타불 [阿彌陀佛] (두산백과)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할머니와 같이 무량수전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관심이 많다.

 

 

무량수전에는 눈여겨볼 수법이 많다.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것들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새에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수법들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기둥을 중앙보다 좀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는 모두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작용들이다.

안허리곡은 가운데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하여, 위나 옆에서 무량수전을 보았을 때

처마 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범종루처럼 2층 구조로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가진 안양루..

* 참고 :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안양(安養樓)는 무량수전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 영역을 이룬다.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대석단과 어우러져 밑에서 올려다보면 매우 위세가 있다. 그러나 밑에서 보는 것과 달리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면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며, 허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다.

 

안양루 밑을 지날 때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는 현판을 보며 지나게 되지만

문(門)을 지나 위로 올라와 누각을 보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이 보인다.

안양루의 ‘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이 되는 셈이다.

 

 

조사당으로 올라가는 박석길.. 팔을 양옆으로 흔들어 날갯짓을 하며 날듯이 뛰어 올라간다ㅣ..

 

 

혹 돌길에 걸려 넘어질까.. 몸이 단 사람은 따로 있다. ㅎ

 

 

조사당(祖師堂)은 창건주인 의상대사와 역대 조사들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다. 이곳은 처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로 여겨진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말 그대로, 바로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 조사당(祖師堂)은 불교 종파의 조사 또는 사찰의 창건주 등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 당우(堂宇)의 하나이다.

 

 

동쪽 창 추녀 밑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仙扉花)라고 전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骨曇草)라고 하며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한다”고 이중환의 『택리지』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꽂은 바로 그 나무인지야 알 수 없다.

퇴계 이황은 이 선비화를 보고 「부석사 비선화시」(浮石寺 飛仙花詩)를 남겼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겼는데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러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 참고로 선비화(禪扉花)는 <선승의 방문 앞에 피어 있는 꽃>이라는 뜻이 된다. 
  아래에 浮石寺 飛仙花詩 원문과 위와 조금 다른 시 해석 하나를 더 소개한다. 

 

  擢玉亭亭倚寺門   옥인 양 높이 솟아 절문에 기대어 있으니 

  僧言錫杖化靈根   석장(의상의 지팡이)이 화한 뿌리라고 중은 말을 하는고야

  枝頭自有曹溪水   그 가지 머리에는 <조계의 물>이 있었으려니

  不借乾坤雨露恩   천지간의 비와 이슬의 은택을 빌리지 않았으리라 

 

 

선비화(禪扉花)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로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나무가 선비화라 한다.

 

조선 광해군 때에 경상감사가 된 정조(鄭造)라는 이가 부석사에 와 선비화를 보고

‘선인의 지팡이였던 나무로 내 지팡이를 만들겠다’라며 나무를 잘라 갔으나 다시 줄기가 뻗어 나와

전과 같이 잘 자랐고, 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죽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아기를 못 낳는 부인이 선비화의 잎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내려와 나뭇잎을

마구 따 가는 바람에 나무가 많이 훼손되었다 한다. 높이 170cm, 뿌리부분 굵기 5c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수령이 최소 500년에 이른다고 알려진 부석사의 선비화는 현재 철책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선비화 [浮石寺禪扉花] (두산백과)

 

골담초(骨擔草)

사람들은 옛날부터 나무 이름을 지을 때 쓰임새나 모양 같은 것을 많이 생각해서 이름을 붙여 왔다.

골담초(骨擔草)가 그렇다. 약재로 쓰여지는데 뼈와 관계되는 약을 처방한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골담초의 다른 이름으로 금작목, 금작화, 금계인 등이 있는데, 이렇게 이름이 많은 것은

다재다능한 사람이 별명이 많듯이 다양한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골담초는 아주 옛날 중국에서 들어온 꽃나무다. 키가 2.5~3.0m밖에 안 되는 관목류이지만 5월에 피는 아름다운 꽃과

특이하게 생긴 잎이 약재로 널리 쓰이기 때문에 가정집 뜰이나 오래된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골담초 (우리 생활 속의 나무, 2008. 3. 25.)

 

 

선비화를 설명해 주는데.. 알까 모르겠다. ?

 

 

대사님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시키지 않아도 워낙 인사 하나는 잘한다. *^^

 

 

힘든 줄도 모르고.. 또 뛰어다닌다.

 

 

아빠 팔에 매달려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ㅎ

 

 

조사당에서 약 50m를 더 올라가면 부석사 제일 뒤쪽 숲 속에 응진전과 자인당이 있다. 힘들게 올라가며.. 손녀가 하는 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오늘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아~ 엄마, 아빠가 무사해서 다행이다"라고 한다. 나 원 참!

 

 

그만 가자.. 좀 천천히 가자.. 엄마가 더 지쳤다.

 

 

이정도 쯤이야.. 하며 또 뛴다.

 

 

응진전(應眞殿)은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보통 사찰의 경우 대웅전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인당(慈忍堂)은 원래 스님들의 선방으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인근 사찰 터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석불을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으로 고쳤으며. 이는 곧 부처임을 자인(慈忍) 대사라 하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새로운 장난감 발견.. 민들레 갓털 불어 날리기다. ㅎ

 

 

내가 먼저다.. 푸우~ 내가 먼저야~ ㅎ

 

 

이어서.. 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더니..

 

 

아이! 깜짝이야!

 

 

이제 그만 내려가자..

 

 

샘터에서 손을 씻고..

 

 

내려가는 길에서 되돌아본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의젓하면서도 육중하거나 둔하지 않다. 다시 최순우 선생의 말을 빌려보자.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게가 적당히 무거워 보이는 팔작지붕, 앞에서 보아 세 칸으로 단정한 격자문이 달린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1916년에 해체·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5)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 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본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대개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같은 건축사적인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손을 잡고 내려오면서.. 손녀가 "아~ 오늘은 피곤한 하루였다"라고 묻지도 않은 소감을 말한다. *^^ 

할머니가.. "오늘 말도 잘 듣고 씩씩하게 혼자 잘 걸어 다녔어"라고 하자.. "아니 뭘~"라고 대답한다.    

 

 

되돌아본 범종루.. 이층 누각으로 현판에는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있고, 누각에는 법고와 목어가 있다.

 

 

그냥 갈 수 없어..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부석사 박물관에도 들러 보았더니..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

 

 

 

※ 부석사 가람배치도 및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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