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비경길 트레킹

박삿갓의 산행일기 2016. 5. 18. 21:10

봉화로 시집 간 막내딸네 집에 간 김에.. 낙동강 비경길 트레킹에 나섰다.

낙동강 비경길은 양원역∼승부역 5.6㎞ 구간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 트레킹 일시 : 2016. 5. 13 (금요일)  * 인원 : 2 名
▶ 경로 : 양원역 - 5.6km → 승부역 (낙동강 비경길)  
▶ 트레킹 시간 : 2 시간 15분 (10:00 ~ 12:15)      
▶ 날씨 : 오전은 조금 흐렸지만 오후 들어 점점 맑아지던 날  

 

▶ 일정 : 08:55 봉화역 출발.. 09:50 양원역 도착.. 양원역 승강장은 단순하게 1면 1선의 구조를 하고 있다. 

 

 

1955년 영암선 개통 당시 승부역에만 기차가 서자 역이 없던 원곡 주민들은 분천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원곡을 지날 때

기차에서 짐 보따리만 던져놓고 승부역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시오릿길을 걸어와 보따리를 챙겨야 했다.

그러다가 1988년 양원역에도 기차가 서자 주민들이 역사와 화장실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비닐하우스처럼 만든 농산물직판장과 먹거리장터.. 오전 10시 개장인지.. 할머니 한 분이 비닐을 말아 올리기 시작한다.

 

 

양원역은 1988년 주민들이 직접 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역이다. 당시 정부의 허가는 났지만,

철도청에서 역을 만들어주지 못한다고 해서 마을 주민들이 흙과 돌을 날라 직접 지었다고 한다.

 

왼쪽 작은 흰색 건물이 양원역 대합실이다. 양원역이 세워지기 전에 원곡마을 주민들은 장을 보러 가거나

외지로 볼일을 보러 나가기 위해서 이웃한 분천역과 승부역까지 기찻길을 따라 걸어 다녀야 했다고 한다. 

 

 

 

[간이역, 그곳 .3] 봉화 양원역(상)

 

#1 목숨을 내놓고
철길을 걸어 걸어 이고 지고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원곡마을과 울진군 서면 전곡리 원곡마을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물줄기는 원곡을 서로 다른 행정구역으로 갈라놓았지만, 원곡은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하나의 마을이었다. 철길은 낙동강 물길 따라 놓였고 기차는 서지 않고 ‘쌩’ 하니 마을을 관통해 갔다.

원곡마을에서 봉화 승부역까지는 기찻길로 약 3.7㎞, 분천역까지는 약 6.2㎞. 마을에 사는 이는 스무 명 남짓, 모두가 노인이었다. 춘양으로 장을 보러 갈 때면 노인들은 기찻길을 따라 분천역으로, 승부역으로 걸어가야 했다. 철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지나, 피할 곳 없는 길을 목숨을 내어 놓고 다녔다. 가장 가까운 승부역까지 터널과 교량은 모두 6곳. 이 길에서 기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숨진 주민이 7명이었다.

“다친 사람도 많았지요. 장에 갔다가 다리 밑으로 빠진 사람도 있고, 산 사람도 있고, 사고 난 사람도 있고. 억수로 고생했니더.”

“터널 안이나 교량 위에서 열차를 만나 다리 아래로 떨어지거나 열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니더. 마, 지금은 전설 같은 얘기 아이니껴.”

“굴에서 기차를 만나면 딱 이렇게 벽에 붙어 서. 보따리는 땅에 놓고 붙어 서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이고지고 그래 다녔어요.”

춘양에서 장을 봐 올 때는 마을을 지날 즈음 무거운 보따리를 열차 밖으로 내던졌다. 애써 둘둘 싸도 보따리 안의 물건들은 깨지기 일쑤였다.

“그때는 시장에 가면 쌀도 사고 생활 용품도 많이 사오니까 승부역에 내려서 짊어지고 오려면 4㎞라. 힘이 들어 다 못 지고 오니까 저 커브에서 완전히 돌면 짐을 던져. 손잡이 한쪽을 잡고 보따리를 들고 앉으면서 보따리를 살며시 놓으면 이 보따리가 굴러가다가 멈춰. 괜찮은 것도 있고 일부는 터져서 파손이 되는 수도 있고 그랬어.”

밀가루 안에 묻어둔 농약병이 깨지는 날엔 그야말로 결단이었다.

우회하는 산길은 너무 멀었고,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위험하고 긴 철길을 걸을 순 없었다. 열차에서 내린 주민들은 철길을 따라 거꾸로 걸어가 짐을 챙겼다.

“열 명이라든가, 열한 명이라든가. 여튼 그렇게 죽었다 카대. 여기에 역이 생기고 기차가 서기 전까지.”

 

 

#2 주민들이 직접 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간이역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국가 축제는 나라님의 마음을 보드랍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1988년 역을 지어달라는 눈물의 탄원서가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원곡마을은 그렇게 원하던 간이역 허가를 받게 된다.

“대통령이 선거연설을 하는데 보통사람이라고 안 하나. 그래서 보통사람 이야기를 들어줄까 하고 그냥 우리가 사는 애로사항을 적어서 편지를 한 장 했지. 철도청에도 편지를 했고. 그런데 허가는 났는데, 철도청에서는 역을 못 만들어 준다 안카나. 주민의 힘으로 역을 만들라고만 해. 그래서 우리가 나선 거라.”

누구랄 것 없이 삽과 괭이를 들고 지게를 지고 나왔다. 마을 주민들 스스로 시멘트 값을 추렴했다.

“동네 사람이 만들었어요. 철도청에서 안하고. 건축 재료만 보조를 받았어요. 밭의 돌 전부 빼서, 마을에 딱 한 대 있던 경운기에 싣고, 사람들도 돌 나르고, 전부 그렇게 했어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여자고 남자고 식구가 있는 대로 다 나와서 흙이고 돌이고 전부 다 우리 손으로 이고 지고. 그래가 이래 역사를 우리 손으로 다 만들고 그랬지.”

그렇게 승강장과 대합실, 화장실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래 지을라꼬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힘들게 만들고 보니 기차가 딱 멈춰. 암만 짐이 많아도 여기까지만 가지고 오면 되는 기라. 마음대로 자식들 집에 가든지 장에 가든지, 그래도 덜 힘들게 가고, 올 때도 그렇게 덜 힘들게 오고.”

 

 

#3 ‘양쪽이 원곡마을’…
역이름은 양원으로


역 이름은 무어라 할까? 처음에는 역 이름을 ‘원곡’이라 지으려 했다. 그러나 철도청은 중앙선의 ‘원덕’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원곡 사람들은 분천역에 모여 역 이름을 의논했다.

“양쪽이 원곡인께 ‘양원’ 어떠니껴?”

이로써 1988년 4월1일(1988년 3월30일 대한민국관보 철도청고시제9호) 국내 최초의 민자 역사이자 가장 작은 역인 양원역이 탄생했다. 1955년 영주 철암 간 영암선이 개통되고 33년 만의 일이었다. 노선도에는 없는 임시 정거장이지만, 처음 기차가 서던 날 사람도 산도 강줄기도 감격해 울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우리는 여기에 서는 기차가 다른데 사람들 비행기보다도 더 좋아, 우리에게는 진짜 기차가 아주 소중해.”


  

[간이역, 그곳 .3] 봉화 양원역(하)  

 

#1. 5일에 한 번 세상구경, 참 고마운 양원역

양원역은 6.6㎡의 시멘트 단칸 건물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얹혀 있다. 정면 입구에는 ‘양원역 대합실’이라고 적힌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다. 안에는 간이 의자가 놓여 있고 시계와 열차 시간표, 거울이 걸려 있다.

정갈함으로는 세계 일등일 것 같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화장실이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화장실은 높이가 어깨 정도에 문도 없다. 들어가 일을 보려면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고 찔끔찔끔 후진해야 한다.

양원역에는 아침저녁 하루 두 번 기차가 섰다. 동이 트자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역으로 향한다.

“춘양장 가요. 오늘 장날이에요.”

“실도 사고, 장갑도 사고, 머리도 하고.”

“순댓국도 사먹고, 국밥도 사먹고, 온갖 필요한 거 사야지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춘양장날은 양원역을 지나는 영동선 기차가 가장 북적이고 바쁜 날이다. 산골 사람들이 5일에 한 번씩 세상 구경을 나가는 날이기도 하다. 승부역에서 먼저 탄 반가운 이웃도 만난다. 역무원이 없으니 차표는 열차 안에서 산다.

“철길을 걸어 다니다가 기차를 타니 얼마나 좋아요. 춤을 췄지요.”

“장터 병원에 있는 보고 싶은 이들에게 가는 것조차 망설여야 했는데.”

“집 앞에 내려주니 얼마나 좋아요. 옛날에는 분천서 내리면 걸어서 한 10리는 더 갔지. 이고 지고.”

참 고마웠다.

“옥수수 삶아서 차장에게 올려주고 그랬지요.”


#2. 2006년의 감동 실화, 여섯 살 진슬이 어린이집 통학 작전

여섯 살 진슬이는 세 살배기 동생 한비와 함께 원곡마을에 살았다. 도시에서 살았지만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원곡의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자동차로 15분 걸리는 인근 초등학교의 병설유치원은 통학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춘양의 어린이집까지 기차로 통학하는 것이었다.

“친구 하나 없이 산골에 사는 외손녀가 얼마나 안타까워.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춘양역장님하고 어린이집 원장님을 만나 통학문제를 상담했는데 쾌히 입학 승낙을 받았어.”

진슬이는 매일 오전 10시 양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춘양역에 내린다. 역에는 어린이집 원장이 마중 나와 계신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하루를 보낸 진슬이는 오후 6시22분 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에 어린아이를 혼자 태울 때는 유기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어요. 얼마나 민망했는지.”

열차에 타고 있는 동안은 승무원이 챙긴다. 지친 아이가 잠이 들면 안고 내려 할머니 품에 안겨줬다. 춘양역 직원들도 아침저녁 아이가 열차에 타고내리는 것을 살펴주었다.

원곡 마을의 단 한 명뿐인 유치원생을 춘양까지 통학시키기 위해 아이의 가족과 춘양역 직원, 열차 승무원들이 힘을 모았던 이 일화는 2006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2008년 1월 시간표가 개정되면서 진슬이가 타고 다니던 완행열차는 운행을 멈췄다. 대신 동대구역까지 가는 열차가 아침저녁으로 양원역에 서게 되었고 양원마을 사람들은 더 먼 곳까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3. 위기의 양원역을 구하라, 주민들의 격일제 탑승 사연

그러던 중 양원역에 위기가 찾아온다. 산골마을 간이역은 북적이는 날보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열차에 손님이 없는 간이역을 모두 없앤다는 말이 들려왔다.

2011년 10월5일, 전라선 KTX 개통과 동시에 이루어진 열차 시간표 개정으로 양원역은 정차역에서 제외될 예정이었다. 주민들은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양원역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기차를 탔다. 격일제로 돌아가며 열차에 올랐다. 결국 정차역 제외 예정은 취소되었고 무궁화호 취급역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양원역은 원곡마을 사람들이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이 역을 없앤다는 소리를 몇 번 했는데 모두가 힘을 모아서 그대로 놔두니 고맙죠.”


#4.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 노선도에는 없다

2014년, 양원역에는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4회, 새마을호 등급의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하루 6회 정차한다. 오랫동안 타고 내리는 이는 마을사람들뿐이었지만, 이제는 전국에서 이 작은 간이역을 찾아온다.

열차가 서면 수많은 사람이 이 작은 역을 가득 채운다. 작은 역 앞에는 작은 장터가 열린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원곡의 손 거친 사람들이 맑은 골짜기에서 키우고 얻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사간다. 철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지게 했다.

원곡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양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춘양장이나 철암장에 가서 생필품을 구입한다. 여전히 열차 노선도에는 양원역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기차가 선다. 전국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양원역에….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출처 : 영남일보 2014년 11월 4일자, 11일자 게재 내용

 

 

 

구식 흑백 텔레비전.. 전원이 연결돠어 있나 살펴본다. ㅎ

 

 

대합실은 제법 넓은 공간으로 긴 의자와 시계, 열차 시간표, 대형 거울도 있다. ㅎ

 

 

간이식당에.. 감자떡 3천 원, 오징어순대 8천 원, 수수부꾸미 4천 원, 감자전병 5천 원, 찐옥수수 등 통나무 메뉴판..

추억의 잔막걸리(한잔) 1,000원, 돼지껍데기 1,000원에 찹쌀동동주, 우거지국밥, 떡 음료 등 현수막까지 보인다. ㅎ

 

 

마을 주민들이 음식을 판매하는 간이식당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며..  탐방객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낙동강 세평 하늘길은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12.4㎞로, 낙동강 상류의 협곡 비경과 청정한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2.2㎞의 체르마트길(비동승강장∼양원역)과 5.6㎞의 낙동강 비경길(양원역∼승부역)을 포함한다.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산과 강, 기차가 어우러진 낙동강 세평 하늘길은 분천역을 기점으로 다양한 코스를 짤 수 있는 곳이다.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걸어간 다음 열차를 타고 돌아오거나 반대로 열차를 타고 승부역에 가서 걸어올 수 있다. 양원역과 승부역 구간, 분천역과 양원역 구간만 걸을 수도 있다.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는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되고,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 비동승강장(체르마르길) 2.2Km, ↙ 구암사 2.3Km, 승부역(비경구간) 5.6Km →)

 

(* 아래 낙동강 세평 하늘길 안내도는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승강장 철길 건널목 건너로 낙동강 물길이 보인다.

 

 

10:00 낙동비경길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양원역 대합실, 그 뒤로 보이는 양원비경전망대에 올라가면 마을의 전경이 다 보인다고..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원곡마을과 울진군 서면 전곡리 원곡마을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원역은 ‘양쪽이 원곡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비경길의 일부 트레킹 코스는 철길 밑 콘크리트 구조물 위로 길이 나있어 오지 트레킹이란 말이 조금은 어색하다.

 

 

자연적인 강변과 철길 옆을 따라 걷는 색다른 복합적 트레킹코스다. ㅎ

 

 

이렇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재미도 있다. ㅎ

 

 

낙동강 상류라고 하기에는.. 강 구석 한편에 거품이 몰려져 있고, 생각보다 강물이 깨끗하지 않다.

철암 등에서 흘러나온 생활 하수와 석포 인근의 제련소 등 공장 폐수의 영향인지.. 걱정스럽다. ㅠ,ㅠ 

 

 

피암 터널 부근을 지나면 '뱀주의'라는 안내판이 보이는.. 깊은 숲길이 이어진다. *^^

 

 

뱀이 나온다니 머뭇거리다가.. 승부역에서 내려오는 부부 탐방객이 솔밭길에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다. ㅎ

승부역에서 내려오는 방향를 선택하면 양원역 먹거리 장터에서 막걸리 한 잔 하기 좋게 점심시간이 맞는데,

사실 계곡이나 강의 경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유롭게 보아야 제대로 절경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우거진 갈대숲을 여유롭게 걸어 나가면...

 

 

낙동강 상류의 멋진 경치가 눈앞에 펼처진다. *^^  (*야래 사진은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음)

 

 

마침 철교 밑을 지날 때..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가 철교 위를 달린다. ㅎ

 

 

철교 밑을 지나면 테크길에서 가파른 철계단이 보이는데.. 이리로 올라가면 헛고생이다. 아마 예전 트레일 코스인 듯하다

 

 

철교가 내려다 보이는 테크길로 강을 따라 그냥 조금 더 올라가면.. 

 

 

태극물길전망대에 이른다.

 

 

출렁다리와 절벽으로 이어진 테크길 아래쪽에.. 바위 좌우로 갈라져 흐르는 물길이 태극 모양인 것 같기도 하다.

 

 

출렁다리는. 혼자서 건너도 조금씩 출렁거린다고 겁을 내지만..

 

 

철길 밑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길은 단단하니 맘 놓고 걷는다. ㅎ

 

 

터널이 있는 절벽 옆을 돌아서 가면..

 

 

철길 밑 콘크리트길에 멋진 동양화 한 폭이 피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웬 가로등..? 유리등 안에 전구도 없고.. 장식용 같지는 않고.. ??

 

 

하여간.. 계곡 물길은 올라가면서 보아야 제대로 물빛을 볼 수 있는 법이다. ㅎ

 

 

낙동정맥트레일은 태백시 구봉산(九峰山:太白弟)에서 부산광역시 물온대를 잇는 백두대간 낙동정맥과,

산길, 오솔길, 강변길을 길게 연결하여 걷는 길을 일컫는 트레일(Trail)의 합성어이다. *^^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긴 세월 버텨온 바위.. 시원하게 들리는 강물 소리가 그만이다. ㅎ

 

 

강 건너편 절벽에 바위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흔적이 보인다.

 

 

금강송 몇 그루가 우뚝 서있는 길을 지나면.. 잠수교가 보인다.  

 

 

잠수교 직전에서 뒤돌아 보이는 갈림길.. 오른쪽은 사유지로 연결된 길이다.

 

 

 

건너 갈까? 그냥 갈까? 바닥에 화살표까지 있는데.. 잠시 두리번거리다..

 

 

잠수교를 건너와.. 강변 오른 편으로 난 농로를 따라 조금 더 가니.. 철교와 용관바위가 보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

 

 

승부역 강 건너편으로 산에 우뚝 서 있는 용관바위는 ‘용의 갓’이라는 뜻을 지닌 소원바위라고 한다.

 

용관(龍冠)바위와 용관바위 앞의 굴통소(窟筒沼), 뒷산 용등재 등은 전주이씨 7대조인 절충(節忠)장군의 전설이 어린 곳이다.

※ 용관바위는 석포면 승부리 승부역 맞은편에 있는 바위이며 전주 이씨 7대조인 절충장군이 이조 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산세가 험한 이곳 승부로 귀향오게 되어 재를 넘으려고 할 때 전둥과 번개가 심하여 주막에서 밤을 세우게 되었다.
    꿈에 용이 나타나 "나는 이곳 굴퉁소에 살고 있는 용이니라, 이 재는 나의 등이고 재넘어 바위는 나의 갓이니
    감히 이 재를 넘어 바위를 만지고 지나가는 자는 살아가지 못할 것이니 재를 넘지 말고 낙동강으로 돌아서 가라"고 하자
    무사했다고 한다.  그후 절충장군은 이바위를 용관바위(용의 갓)라 칭하고 매년 제를 올려 자자손손 큰복을 받았다고 함.
    그 이후로 어려움이 있을 때 용관바위를 향하여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관바위를 지나고 나면.. 강 건너 참밭골에 눈꽃마을 조형물과 식당 등 간이 시설물과 물레방아 등이 보인다. *^^

물레방아는 물판이 떨어졌는지.. 제대로 돌지 않고 왔다 갔다하고.. 세찬 바람에 송화가루가 안개처럼 날린다.

 

송화 가루(松花粉)는 봄철에 소나무에서 나오는 꽃가루이다. 곤충을 이용한 꽃과는 달리 바람을 이용해 수분하는

풍매화인 소나무는 대량의 꽃가루를 만들어 내어 바람에 날려 보내서 수분을 시도한다.

송화 가루를 확대하면 두개의 큰 공기주머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로 인해 바람에 잘 날라 다닐 수 있다.

형태는 노랗고 연두빛이 나며 고운 가루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모아 식용으로 먹기도 한다.

송화 다식은 궁중음식으로 유명하며 술이나 면에 섞어 먹기도 한다.

 

송화 가루는 봄철에 코와 기관지로 들어와 알레르기성 호흡기 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반면 송화 가루가 양만 보면

나무들 가운데 매우 많지만, 꽃가루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견해도 있다. * [위키백과] 자료 인용 

 

 

12:15 승부역으로 트레킹을 완료한다.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가 승부역에 서면서 간이매점까지 생겼다.

매점은 다섯 개로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청계란 한 줄(3천 원)로 마수걸이를 했다. ㅎ

 

 

매점 한 쪽 휴식공간에 백설공주와 마귀할멈이 반겨준다. *^^ 

 

 

이 녀석은 언제나 주먹만 쥐고 있으니.. 보를 내면 틀림없이 이긴다. ㅎ

 

 

포토용 흔들의자(2인용, 휴식용은 매점 앞에 있음).. 배낭 위에 디카를 올려놓고 자동으로 찰깍! 

 

 

※ 아래 안내판 사진들은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음. 

 

 

봉화 승부역 주변에 명품 숲길 탄생

산림청 봉화군 코레일 공동으로 조성

 

백두대간 협곡열차 운행구간인 경북 봉화 승부역 주변에 명품 숲길이 탄생했다.

산림청과 봉화군, 코레일이 공동 조성한 이 숲길은 트레킹을 겸하는 기차여행 코스로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

2일 남부지방산림청 영주국유림관리소에 따르면 이승만 기념비∼앞산 투구봉∼질금전망대∼철쭉터널

∼자작나무길∼투구봉약수터∼현수교∼승부역을 돌아오는 3.2㎞ 구간의 복합경관숲 조성사업이 2일 마무리됐다.

 

산림청은 한반도 지형의 세평뜰 비경을 감상할 질금전망대와 비룡산 승부마을 낙동강비경이 내려다 보이는

투구봉전망대를 설치했고, 자작나무길 철쭉터널 풍경소리길 등 다양한 숲길을 조성했다. 산책로 주변에는

아그배나무, 피나무, 서어나무 등 희귀수종 군락지를 조성하고 약수터에는 족욕체험장도 만들었다.

※ 위 기사 출처 : 한국일보 보도 내용 (2015. 12. 2) 

 

 

낙동정맥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전국토의 근골(筋骨)을 이룬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영천의 운주산(雲住山, 806m)까지 높이 1,000m에 달하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월성군 서면 아화리의 낮은 구릉을 넘어 다시 경상남도의 가지산(加智山)을 거쳐 부산다대포 의 몰운대까지로,

낙동강 동쪽 하구에서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동정맥 [洛東正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봉화 2구간은 승부역을 기점으로 양원, 분천역을 잇는 총 10.1Km의 영동선의 대표적인 구간으로,

승부역에서 배바위재를 넘어 비동마을을 거쳐 분천역으로 가는 산행코스(9.5Km)와 강변코스가 있다.

 

 

승부역 승강장의 작은 대합실(맞이방). 왼쪽에 보이는 나무가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는 단풍나무다.

 

 

 

[간이역, 그곳 .5] 봉화 승부역(상) 

 

무수히 많은 곡선이 이어진다. 계곡의 굽이를 따라 기차는 달린다. 때때로 차량의 앞부분이 보였다. 골짜기에서는 물의 움직임이 요란했고, 절벽의 바위 사이로는 거무스름하고 늠름한 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낮은 물길과 깎아지른 절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마들었고, 캄캄한 터널이 몇 개 계속되다가 다시 밝아지면서 어둠과 밝음이 반복되었다.

기차가 산 깊숙이 들어가면서 더욱 장엄하고 웅대하며 더욱 외로운 전망이 열렸다. 긴 피암 터널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에 물길을 가로지르고 있는 붉은 현수교가 보였다. 계곡은 날카로운 역삼각형을 그리고 있었고 기차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해 점점 속도를 늦추다 결심처럼 멈추어 섰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벽을 만난 듯도 했고, 전의를 다지는 숨 고르기 같기도 했다. 무수한 곡선의 끝에 도달한 세상의 외진 귀퉁이였다.

 

#1 직선과 속도로는 갈 수 없는 곳

승부역 탄생과 이승만 대통령 친필 애도

태백의 황지에서 흘러넘친 황지천이 철암에서 철암천을 만나 낙동강이 된다. 태백의 고원에서 봉화로 내려오면서 지형은 갑자기 낮아지고, 석포에서 석포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더욱 불어난 몸집으로 빠르게 돌진한다.

이 위협적인 물살이 바위를 깎고 산을 휘감으며 빚어낸 협곡, 그 협곡의 천애 절벽을 깎아 겨우 확보한 공간에 승부역이 앉아 있다. 낮은 지붕의 벽돌조 슬래브 건물의 역무실과 철길 가운데 섬처럼 덩그러니 놓인 한 평 반짜리 대합실이 전부다.

1950년, 영주에서 시작된 영암선 건설은 봉화와 춘양을 거치고 현동을 지나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공사는 철암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봉화의 석포를 지나면서 철길은 다시 멈춘다. 올라가던 길과 내려오던 길이 멈춘 곳, 그곳이 바로 승부였다. 까마득한 계곡과 암반으로 들어찬 산들이 첩첩이 막아서 있었다. 인부들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난공사였다.

“갓 결혼했을 때였어. 서울 신접살림을 접고 내려와야 했지. 철도 기술은 대한민국 토목 분야 그 어느 곳보다 수준이 높았어. 그래도 여긴 워낙 험한 데라 난제가 많았어. 협곡을 돌파하는 터널, 교량, 급경사 우회를 위한 각종 시설들, 게다가 시멘트와 철근이 부족해서 애로가 많았지. 공비들도 수시로 출몰해서 국군이 주둔해 치안을 담당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사의 공정을 준수하는 것, 그게 제일 큰 책무였어.”

3개월여에 걸쳐 노선과 구조물 검측을 비롯한 공사 계획을 모두 마치고 본격적으로 착수하려던 1950년 6월27일, 갑자기 철도 건설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해안으로 상륙한 공산군이 삼척 철암 지구로 들어오는 중이니 전면 철수하라.”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 속에서도 정부는 철도 건설에 매진했다. 그렇게 1955년 12월30일 영암선은 완공되었다. 다리 55개, 터널 33개로 전체 구간의 20%가 다리와 터널로 이루어진 국가의 대동맥이었다. 하지만 험난한 공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영암선 개통 기념비가 가장 난공사였던 승부역에 세워졌다. 기념비의 전면 중앙에는 자연석판에 ‘榮巖線 開通 記念(영암선 개통 기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起工 檀紀 四千貳百八拾貳年 四月 八日, 竣工 檀紀 四千貳百八拾八年 拾貳月 參拾日 交通部 鐵道建設局(기공 단기 4282년 4월8일, 준공 단기 4288년 12월 30일 교통부 철도건설국)’이라고 쓴 준공 표지석이 부착되어 있다. 철길을 완성한 ‘무명산업전사’들의 희생에 대한 애도였다.

이듬해인 1956년 1월1일 승부역은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1955년 12월31일 대한민국관보 교통부고시 제452호). 직선과 속도로는 갈 수 없는 이 험준한 땅에, 기차는 무수한 곡선을 타고 마침내 도달했다.


#2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

기적소리와 함께한 승부역 사람들


처음 승부역 건물은 승강장 가운데 1번 선로와 2번 선로 사이에 있었다. 섬과 같은 고립무원에 들고 나는 길은 오직 기차뿐이었다. 낮은 짧았고 역무원들의 시간은 유배처럼 길었다. 골짜기는 하늘보다 먼저 어두워졌고, 검은 오디처럼 윤기 나는 밤이 오면, 기차 기적 소리만 간혹 길게 울렸다.

1963년 승부역에 한 역무원이 부임해 온다. 그는 사방을 경계 짓는 협곡에 둘러싸인 채 오랫동안 오고 가는 검은 화차를 배웅했다. 승부역으로 온 지 두 해가 지날 즈음, 그는 철로변 공터를 골라 꽃밭을 가꾸었다. 땅을 고르던 그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협곡으로 잘린 좁은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이곳은 하늘이나 꽃밭이나 세 평이 못 되겠구나.’

그는 옆 공사장에서 쓰고 남은 페인트와 붓을 빌려 꽃밭의 바위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고립감과 자긍심이 배어있는 이 시는 승부역의 상징이 되었다. 꽃밭을 갈고 시를 썼던 이는 역무원 김찬빈씨다. 그는 무려 19년 동안 승부역에서 근무했다.

“길이라곤 철도뿐이었지요. 19년 근무하며 심심풀이로 약초도 재배했습니다. 나중엔 영주에 집도 한 채 샀고요.”

그가 일구던 꽃밭의 바위벽에는 지금도 흰 페인트로 쓰인 그의 글이 남아 있다. 그 옆 바위에는 ‘일초여금(一秒如金)’이라는 글귀도 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뜻이니, 이 또한 짧은 유배지에서의 근면과 헌신을 다짐한 어느 역무원의 마음이겠다.

승부역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하루 60번 이상 오갔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승부역은 1977년 5월1일 화물취급이 중지되었고, 1994년 1월1일에는 소화물 취급마저 중지되었다. 1996년에는 선로 사이에 있던 역사가 선로 밖으로 옮겨졌고, 1997년 10월15일에는 배치 간이역으로 전락했다.

역무원들은 기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기차가 멈추는 시간이 근무교대 시간이었다. 홀로 역사를 지키는 역무원에게 차가운 겨울밤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지만, 아침이면 길고 눈부신 백색의 세상을 뚫고 통근 기차가 도착했다.

“고생 많았지. 그래도 오늘은 정말 좋았어. 눈꽃열차였거든.”

눈 내린 날이면 영동선 역무원들은 통근열차를 눈꽃열차라 불렀다. 1998년에는 진짜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었다. 하늘 세 평, 꽃밭 세 평의 승부역은 이때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 내리는 한철이었다. 정기 여객은 하루 네 편밖에 서지 않았고, 무궁화호는 몽땅 지나쳐 갔다.

서른한 살의 총각 정회씨가 승부역에 온 것은 1999년이다.

“외롭지요. 하루 종일 사람 보기가 어려워서요. 무궁화호 열차에서 승객들이 던져 주고 가는 주간지도 위안이 됐죠.”

그래도 정차하는 통일호에는 고정 승객이 있었다. 이웃한 석포로 통학하던 초등학생 셋과 중학생 둘, 그리고 닷새 간격이긴 해도 춘양장으로 가는 승부리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누구였을까, 이 총각 역무원을 점찍은 이는? 그는 2000년 승부리의 8남매 집 막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영동선 철도 직원의 절반이 산다는 영주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매일 기차를 타고 승부역으로 출근하는 그에게 승부역은 이제 더 이상 외로운 오지가 아니었다.

“승부역은 씨암탉 잡아주는 장모가 계신 곳이지요.”

이제 두 아들의 아빠가 된 그는 더 이상 승부역으로 출근하지 않지만, 승부는 그가 천생의 배필을 만난 곳이고 장모님이 계신 곳이다.

 

 

[간이역, 그곳 .5] 봉화 승부역(하) 

 

#1 이루어지지 못한 철길위의 사랑
그리고 단풍나무

“그게…. 1970년대 이야기지요. 그때는 강릉에서 영주로 가는 기차와 영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가 여기서 교행을 했어요. 열차가 비껴 갈라꼬 딱 5분 섰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만 보니 매주 일요일만 되면 강릉행 열차에서 처녀가 내리고 영주행 열차에서 청년이 내리더랍니다.”

 

“처녀는 긴 생머리를 했고 청년은 키가 크고 눈매가 서글서글했다지요. 둘이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손을 잡고 걷기도 하다가 열차가 출발하면 서로 열차를 바꿔 타고 갔어요. 처녀는 영주행 열차를 타고 청년은 강릉행 열차를 타고…. 둘이서 그 짧은 5분 동안 데이트를 한 거지요. 매주 보니까 역무원들한테도 예삿일이 됐죠. 처녀는 풍기의 인견공장서 일했다고 합디다. 청년은 태백서 일하는 광부였고. 원체 가난하고 시간도 없으니, 그래 데이트를 한 게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청년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일요일이 되면 처녀 혼자 승강장을 걷거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가더랍니다. 1년이 넘도록 그러기에 한 역무원이 가서 물었다 카데요. 청년은 갱도가 무너져 죽었다고 합디다. 눈물이 글썽글썽 해가꼬. 그라고 얼마 안 있어서 처녀도 더 이상 보이지 않더랍니다. 소문에 처녀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해요. 이게 역무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깁니다.”

 

“저기 저 역사 앞에 단풍나무 있지요, 저기가 처녀 총각이 만나던 자립니다. 옛날에 한 역무원이 그 두사람을 위해서 저 나무를 심었지요. 사연이 하도 가엾고 애달파서….”

 

#2 밤에 환자 생기면
무작정 역으로 뛰었던 승부리 사람들

 

승부역 앞 낙동강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콘크리트로 된 오래된 승부 잠수교, 또 하나는 2003년에 놓인 빨간색 승부 현수교다. 승부 마을은 이 다리를 건너 급한 산자락을 돌아 1㎞쯤 올라가야 비로소 나타난다. 비탈진 밭 사이로 집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감자와 옥수수, 고사리, 고추, 당귀, 콩, 팥과 고랭지 배추 등을 재배한다.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말, 그 이전까지는 호롱불에 의지해 살았다.

“열여덟에 산 너머 마을에서 시집왔는데 화전민이 많았어. 쌀이 없어 감자와 옥수수를 쪄 먹었지. 고생이야 뭐 다 말할 수가 없지.”

쌀은 영주의 곡물상이 주로 공급했다. 열차에 쌀가마니를 싣고 오면 주민들은 지게에 콩과 팥 등을 지고 가 역에서 자루째 바꿨다. 물이 불어나 승부교가 물에 잠기면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비룡산 자락인 다락재를 넘어 소천면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10㎞ 넘는 산길을 3시간 지게를 지고 걸어야 했다.

 

“병원은 갈 엄두도 못 냈어.”

밤에 위중한 환자가 생기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환자를 둘러업고 승부역으로 달려가 역무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역무원이 상부에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으면 화물열차를 겨우 얻어 탈 수 있었지. 석탄 차량의 기관실 한쪽에 누워 영주나 철암의 병원에 도착하면 환자 얼굴이 석탄가루로 새카맸어.”

일부 주민은 한때 양귀비를 재배해 진통제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3 철길위의 또 다른 사연
아버지와 기관사 아들


철길 위에서 죽은 아버지와 기관사가 된 아들의 애틋한 사연도 역은 품고 있다.

“내가 2년을 울었소. 이 철길서 남편 잃고 참말로 막막해서. 막내가 젖도 떼지 않았을 때였지.”

젊디젊었던 여인은 이 마을에서 홀로 5남매를 키워냈다.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았던 막내아들은 어른이 돼서 어엿한 기관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철길을 아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꿈은 기관사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기관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한때는 아버지가 사고 난 지점을 지나다녔어요.”


승부리 사람들은 오직 기차만이 길이었고 호롱불을 켜고 살던 70년대까지가 승부리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집집마다 자녀가 서넛은 됐고 역무원과 철로 보수원까지 합해 100여 가구가 살았지. 분교 학생은 100명도 넘었어.”

주민들은 하나둘 도시로 떠났고 광회국민학교 승부분교장은 93년 결국 문을 닫았다.


80년대 중반, 승부리와 석포를 잇는 산길이 생겼다. 시멘트로 포장된 건 90년대 말이다. 아직 비포장된 구간도 많다. 주민들은 길이 없었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험한 길이지만 이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4 승부역의 오늘
중부내륙 관광열차 서면서 시끌벅적


석포로 통학하던 학생들은 훌쩍 자라 떠났다. 지나는 열차도 대부분 화물차였고 정차 객차는 단 2회 30초간 머물렀다. 춘양장을 오가는 승부리 주민이 가끔 있을 뿐, 고정 승객 하나 없던 승부역은 2001년 결국 열차 신호만 취급하는 신호장으로 격하됐다.

승부역이 다시 보통역의 지위를 되찾은 것은 2004년이다. 환상적인 경치를 선사하는 환상선(環狀線) 눈꽃열차는 해를 거듭하며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초기에 서울 청량리와 강원도 추전역을 오갔던 열차는 대구, 대전, 군산 등지로 확대되었다. 도시 사람들에게 이 눈부신 세계로의 여행은 정신적 여유와 동일한 단어였고, 승부역은 그들이 가장 머물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연말에는 해맞이 열차, 봄에는 산나물 열차, 여름에는 피서열차, 가을에는 단풍열차가 생겨났다. 관광열차가 정차하면서 플랫폼의 길이도 분천 쪽으로 30m, 철암 쪽으로 40m정도 확장되었고, 당시 역사 앞 강변에는 먹거리 장터가 열렸다. 주민들은 직접 쑨 메밀묵과 수확한 콩 등을 가져와 팔았다. 승객들은 감자전을 안주 삼아 옥수수로 만든 동동주를 마시기도 한다. 누군가는 근처 계곡으로 산책을 다녀오고, 누군가는 꽁꽁 언 낙동강에서 지치도록 추억을 쌓았다.


2013년, 승부역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내린다.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가 서면서 승부역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봉화군은 이를 계기로 MTB 코스와 트레킹 루트도 개척했다.

역 뒤에 솟아 있는 투구봉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이들과 승부역에서 배바위재를 넘어 비동승강장까지 연결하는 6.5㎞의 ‘고요숲길’을 걷는 이도 많아졌다.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의 방문이 잦아지고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민박도 생겼다. 계곡과 산길을 달려 오롯이 승부역을 찾아오는 이도 늘었다.

승부역의 플랫폼에는 한때 인력이나 궤도 재료를 운반하던 보선 작업용 핸드카(Hand Car)가 있다. 영암선 개통 초기부터 열차 운행이 적은 선로에 사용되던 이 핸드카는 현재 운행하지 않고 있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영동선 승부역에 보존되어 있다. 이 핸드카가 힘겹게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간은 바로 어저께만 같은데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끝이 없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화차가 지나던 시절도, 들고 나는 이 없던 시절도, 누군가의 서러운 사랑도, 누군가의 고독한 한때도, 머묾도 떠남도, 한결같은 세평 하늘 아래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출처 : 영남일보 2014년 11월 18일, 25일자 게재 내용

 

 

 

대합실 앞 철길 건너편 좁다란 꽃밭 바위벽에 흰 페인트로 쓴 글귀가 보인다.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1963년 승부역에 부임해 19년 동안 근무한 김찬빈 씨가

당시 바위벽에 쓴 글로.. 역무원의 고립감과 자긍심이 배어있는 이 시는 승부역의 상징이 되었다.

 

 

 

승부역 [承富驛, Seungbu Station]

영동선에 속하며, 영주 기점 69.2km 지점에 있다. 1956년 1월 1일 영암선 개통에 따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예로부터 이 곳이 다른 마을보다 잘 살았고 부자 마을 이라고 해서 승부라고 붙여졌다. 1957년 7월 17일 역사(驛舍)를 신축, 준공하였다. 1997년 3월 11일 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2001년 9월 8일 신호장(信號場 : 철도의 정거장의 일종으로 열차의 교행(交行) 또는 대피를 위하여 설치한 장소)으로 격하되었다. 1999년 환상선 눈꽃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어 2004년 12월 10일 보통역으로 재승격하였다. 현재는 석포면 방면으로 도로가 나 있고, 면사무소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운행중이다. 역종은 보통역이며, 승강장 구조는 1면 3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승부역 [承富驛, Seungbu Station] (철도역 정보, 철도산업정보센터)

 

연혁

1956년 1월 1일 : 보통역으로 영업개시
1994년 1월 1일 : 소화물 취급 중지
1996년 9월 17일 : 현재의 역사 준공
1997년 10월 15일 : 배치간이역으로 격하
1998년 12월 13일 : 눈꽃 순환열차 최초로 운행 개시
2001년 9월 8일 : 신호장으로 격하
2004년 12월 10일 : 보통역으로 승격

[네이버 지식백과] 승부역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간이역과 사람들), 2008., 한국콘텐츠진흥원)

 

역무원 김찬빈 씨가 바위벽에 쓴 시는 지금 승부역에 시비로 세워져있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승부역 역무원 김찬빈이 어느 날 역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은 넓고, 높은데

승부역 주위는 너무나 작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지은 글입니다.   

(1963년 - 1981년 승부역 근무)       2004년 11월 20일 철도청장

 

 

승부역은 역무실은 있지만, 승차권을 발매하지 않는 역으로, 예매를 하던가 열차 승차 후 승무원에게 승차권을 구입해야 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강장에 있는.. 한 평 정도의 작은 대합실이지만.. 내 집같이 편안하다. * 참고로 의자 7 개임.. ㅎ

 

 

승부역은 협곡열자, 눈꽃열차 여객열차 등 모든 열차가 정차한다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  

 

 

12:35 V-train이 들어오고 있다. V-train은 승부역에서 10분간 정차하고.. 그동안 승객들이 내려 역구내를 돌아본다.

 

 

12:45 V-train이 출발하자 다시 조용해진 승부역.. 한 평 대합실에서 오붓하게 점심 식사..    

 

 

바람도 많이 불고, 송화가루가 날려서 밖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다. ㅠ,ㅠ   *계란 한 줄은 매점에서 사 온 청란

 

 

식사를 마치고 바로 투구봉 숲길로 향하는데.. 바람도 멎고 날씨도 많이 좋아졌다. ㅎ

 

 

승부역 유물인 핸드카(Hand Car)는 궤도재료 및 보선작업용 공,기구를 운반하기 위해 사용된 인력 장비로,
개통 초기부터 열차운행이 적은 선로에 사용되었으며, 현재 운행하지 않고 유일하게 승부역에 보존되어 있다.

 

 

역사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선로반 사무소 뒤편으로  '영암선 개통 기념비'가 보인다.

 

 

* 투구봉 숲길 산행은 이어서 별도 포스팅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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