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문화제 단종제향 육일무 참가

북치고 춤추는 이야기 2019. 5. 1. 17:00

단종문화제의 핵심 행사인 단종제향에 군민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여 육일무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단종 제향은 그 역사에서 보듯 그대로 계승 보존되고 있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맞은 이후, 중종 11년(1516년) 우승지 신상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함을 시초로

선조, 광해군, 효종, 현종 등이 신하를 보내 노산묘에 치제하였다. 숙종은 1681년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1698년에 조선 6대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으로 추봉되었다.

이때부터 매년 한식에 영월 장릉에서 제향을 봉행, 구한말을 거처 일제강점기에도 제향을 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식날 제향은 1967년 ‘단종제’란 이름으로, 1990년 제24회 때부터는 ‘단종문화제’로

대표적인 지역문화축제로 발돋움하였다. 그 속에서도 단종 제향은 201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본래의 목적과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부터 한식에 지내던 단종 제향을 한식 무렵이면 날씨가 고르지 않아 방문객편의를 위해

매년 4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3일간 행사 기간에 치르고 있다.  

 

  • 일시 : 2019.  4. 27(토)

    10:00 ~ 11:00  단종제향

    11:00 ~ 12:00  헌다례, 제례악, 육일무, 소품 발표

  • 장소 : 장릉 경내

 

 

 

08:40 장릉으로 들어선다. 전날 단종문화제 개막 퍼포먼스에서는 합창을 하고.. 오늘은 9시부터 단종제향 육일무 리허설이다.

 

 

단종은 승하한 지 241년 만에 조선 6대 임금으로 복원됐다. 이에 따라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명명했다.

궁궐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왕릉으로,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의 왕릉' 중 한 곳이다.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이 제례악 연주 리허설을 하는데.. 박(拍) 치는 소리와 악장의 느린 가락에 엄숙함이 느껴진다.

*박(拍)은 여섯 개의 얇고 긴 판목을 모아 한쪽 끝을 끈으로 꿰어.. 폈다, 접었다. 하며 소리를 내는 국악기를 말한다.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을 모신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제향에서 쓰는 음악이다.

 

*종묘(宗廟) :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

*제례악(祭禮樂) : 천신(天神)ㆍ인신(人神)ㆍ지신(地神)의 제향에 쓰는 음악.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이 전한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 조선 시대에, 종묘에서 역대 제왕의 제사 때에 쓰던 음악. 세종 때에 창작한 정대업과 보태평을

 세조 때 최항 등이 손질하고 줄여서 채택하였다. 종묘 제례와 더불어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1호.


영녕전 [ 永寧殿 ]  태조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曾祖)·고조(高祖) 및 공(功)이 없는 임금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  
조선시대 중요하지 않은 임금 즉 이왕가(李王家)의 조상 중 단명했던 왕이나 국가에 공이 없는 왕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이 영녕전이다. 현재 영녕전은 종묘(宗廟)의 서쪽에 있다. 영녕전의 제향(祭享)은 1월·7월 상순(上旬)에 날을 받아 행한다.

음악과 춤은 종묘제향(宗廟祭享)의 것과 같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녕전 [永寧殿]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송방송)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가곡780)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에 의해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두산백과)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 자리 앞에 영천(靈泉)이 있고, 육일무 대기 천막은 영천 뒤편에 마련되어 있다.

 

※영천(靈泉)은 장릉에 있는 제정(祭井)으로 가뭄과 홍수에도 물이 줄거나 늘지 않으므로 영천(靈泉)이라 하며,
   단종의 제삿날인 한식 때면 물이 더 많이 나와 이상한 일이라 전해지는데, 이 물을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다.

 

 

육일무 팀이 리허설을 준비하는 동안 왕릉을 참배하려고, 입구로 내려와 배견정(拜鵑亭)부터 둘러본다.

 

장릉 입구 대형버스 주차장이 있는 담장 안쪽으로 우측에 이끼 낀 바위 위로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배견정(拜鵑亭)이라 불리는 이 정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새를 위한 정자(亭子)라고 한다.

 

 

배견정(拜鵑亭)은 '두견새가 절을 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할 때 단종을 모시던

시녀 6명이 금장강(錦障江, 동강)에 몸을 던졌으며, 낙화암(落花岩)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의 묘소를 찾아와 단종 대왕의 영혼에 절하며 슬피 울었다고 하며, 당시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정자를 세우고 배견정이라 이름하였으며, 바위는 두견새가 앉아 울었다 하여 배견암(拜鵑岩)이라 불린다. 

 

정조 때인 1791년 3월 28일 영월부사로 내려온 박기정이 두견새가 바위 위에 앉아 릉을 향해 우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 애처롭게 여겨, 좀 더 편하게 왕을 배알(拜謁) 할 수 있도록 정자를 지어주었다고 하며,

그 정자가 바로 배견정(拜鵑亭)으로.. 사람이 아닌 새에게 지어준.. 세계에서 유례없는 새를 위한 정자이다.

 바위에는 '拜鵑巖'과 '朴基正'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박기정은 사육신 박팽년의 혈손이라고 한다.

 

 

장릉 입구 측..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 옆으로 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왕릉으로 가는 길.. 신록이 돋아나고 있는 호젓한 산길이다. *^^

 

 

장릉(莊陵)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능으로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으로,

열일곱 나이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간 단종의 어린 넋이 잠든 숙연한 곳이다.

 

단종은 조선조 27대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임금으로,

단종의 기일(忌日)은 정축년(丁丑年,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이다.

*유시(酉時)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를 말한다.

 

단종이 승하하였을 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치우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을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좋은 터를 고를 겨를도 없이 쫓기는 와중에 밀장을 하였다.

 

비운의 어린 왕이었던 단종의 능침 양옆에는 문관석이 슬픈 표정으로 서 있고,

병풍석과 난간석, 무관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봉분은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서쪽(辛方)을 등지고 동쪽(乙方)을 향하고 있고, 정자각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참고로 무관석(武官石)은 무관의 형상으로 왕릉 이외에는 설치할 수 없다.

 

*다른 능에는 문관석과 무관석이 시립하고 있는데 장릉에는 무관석이 없다.

 이는 무력에 의하여 왕위를 찬탈 당하였다는 데서 연유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상 박영국 엮음<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영월을 찾아서' 내용 참조)

 

*신좌을향(辛坐乙向) :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가 서쪽(辛方)을 등지고 동쪽(乙方)을 바라보고 앉은 자리

 

 

능(陵) 아래쪽으로 육일무 리허설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 추고 있는 일무佾舞)도 문무(文舞)로 무무(武舞)가 아니다.

 

문무 [文舞]

종묘(宗廟)와 문묘(文廟)의 제향에서 추는 일무(佾舞)의 하나. 종묘와 문묘제향의 영신(迎神)·전폐(奠幣)·초헌(初獻)의

순서에서 춘다. 왼손에는 약(籥), 오른손에는 적(翟)을 들고 추나, 춤추는 방법은 종묘와 문묘의 경우가 다르다. 

 

무무 [武舞]

종묘(宗廟)와 문묘(文廟)의 제향(祭享)에서 추는 일무의 하나. 무덕(武德)을 상징하는 춤으로 문덕(文德)을 상징하는

문무(文舞)와 쌍을 이룬다. 종묘와 문묘제향의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의 순서에서 춘다.

 

*종묘(宗廟)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역대(歷代) 임금과 왕비(王妃)의 위패(位牌)를 모시던 왕실(王室)의 사당(祠堂)

*문묘(文廟) :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로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한다.

 

 

능묘에서 조금 다시 내려오면.. 아래로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다.

 

 

바쁘게 내려가는 발걸음을.. 예쁜 각시붓꽃이 각시처럼.. 잠시 붙들어 세운다. *^^

 

 

부지런히 리허설을 하고 있는 정자각 앞으로 와보니.. 첫 줄만 어정쩡하게 서있다.. ?

 

 

어쩐지.. 아마도.. 입장, 퇴장 연습이 잘 안되고 있는 것 같다. ㅎ

 

 

여섯 줄로 다시 열을 맞춰서.. 하나, 둘, 하나 둘.. 제식 훈련하는 것 같다. ㅎ

 

 

첫 번째 줄..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 차례차례 줄이어 들어와서 차렷..

 

 

이번에는 퇴장 연습이다. 뒤 줄부터.. 입장 반대 순서로 나간다.

 

 

맨 마지막으로.. 맨 앞 줄이 나오는데..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역시나.. 수복실(守僕室) 주위에 모여.. 선생님이 틀린 점을 다시 알려주는 것 같다. (*수복실은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이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1791년(정조15)에 장판옥을 세워 268인의 위판을 모시고

단종제향 때마다 위판을 정단(正壇,32인)과 별단(別壇,236인)에 모시고 배향하는 충신제를 함께 올리고 있다.

 

장판옥(欌版屋) 바로 앞에 있는 배식단(配食壇)에 단종대왕 신주(端宗大王 神酒) 항아리도 보이는데,

이곳의 단 위에 제물을 차려 놓고.. 충신위 등 영령을 추모하는 제사가 단종제향 후에 진행되게 된다.

 

 

'장판옥'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 모두 26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단종제향 시 충신제를 함께 올린다.

 

배식단(配食壇)은 제사 지낼 때 제물을 차려 놓는 곳으로 네 자리로 나누어져 있어,

충신단(忠臣壇), 조사단(朝仕壇), 환군노단(宦軍奴壇), 여인단(女人壇)으로 구분된다.

 

 

*왕실의 묘제(墓制)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세자와 세자비,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고,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과 연산(燕山)이나 광해(光海)처럼 대군으로

 폐위, 격하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묘(墓)라 부른다. 그래서 이곳 장릉도 숙종 7년(1681년)에 대군(大君)으로

 추봉 되기 전까지의  224년간은 노산묘로 칭하여졌다.

 지금의 능호인 장릉(莊陵)으로 칭하여진 것은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 되어 단종(端宗)의 묘호(廟號)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으로 붙이면서이다.

 (*문화콘텐츠닷컴 참조)   *부묘(祔廟);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일.  *능호(陵號); 능의 이름

 

장릉 [莊陵]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릉 [莊陵] (두산백과)

 

 

단종제향이 시작되기 조금 전 쯤.. 영월부사행렬이 들어오고 있다. (*부사행렬 09:00~10:00 관풍헌→장릉 이동함)

 

 

오전 10시 단종제의 유래와 행사 연혁 등을 설명하고.. 단종제향이 시작된다.

 

 

노란 등을 앞세우고.. 헌관과 집사 등 제관들이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일렬로 들어오고 있다. *^^

 

*홍살문은 그 안쪽에 신성한 왕릉이나 향교, 사당 등이 자리 잡고 있으니 방문객들에게

 경건한 마음가짐과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라고 알리기 위해 설치하는 문이기도 하다.

 

*노란 등 뒤로 보이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은 영조 9년에 세운 것으로 「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라는 비가 있다.

 단종비각은 정자각(丁字閣) 좌측에 세워져 있고, 비각은 반드시 좌측으로 세우는 것이 왕실의 묘제(墓制)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 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薄石)을 깐 참도(參途)가 있고 참도 맨 앞에는 홍살문(紅箭門)이 놓인다.

 

참도(參途)는 두 길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높이로 구분할 수 있다.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 하여 혼백(魂魄)이 다니는 길이고,

낮은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로 왕도(王道)라고 한다. 홍살문은 신성스러운 공간으로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참도(參道) 왼쪽의 높은 길은 능(陵)에 모셔진 왕의 혼령(魂靈)만이 다닐 수 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참배를 위해 찾아온 임금만이 드나들 수 있는 왕도(王道, 또는 御道)이다.

 

*참도(參道)의 끝에 정(丁) 자 모양을 하고 서 있는 정자각(丁字閣)은 제사(祭祀)를 위한 건물로

 중국에서 보았을 때 정방((丁方, 정남(正南)에서 서쪽으로 15도(度) 째 되는 방위))에 있기 때문에

 이곳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왕릉의 정자(丁字)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또한 정자각의 뒷문은

 건물 안에서 능을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실제로 체백이 묻힌 봉분을 보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위패(位牌)를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장릉은 정자각의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나 정자각의 뒷문으로 능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정자각을 오르내리는 계단도 동쪽(정자각을 보고서 우측)과 서쪽 두 곳에

 있는데, 정자각을 오를 때만 쓰는 계단은 두 줄인 반면 내려올 때만 쓰이는 서쪽 계단은 한 줄이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혼령이 사람과 같이 오르지만, 제사를 마치면 혼령은 곧바로 능 안의 체백(體魄)으로

 돌아가고 사람만 남아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고 믿어 신도神道)는 만들지 않고 어도(御道)만 만든 때문이다.

 (*문화콘텐츠닷컴 자료 참조)

 

헌관들이 먼저 정자각(丁字閣)으로 향하고.. (*능 바로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곳이다.)

 

 

*참도(參道)란 왕릉을 참배할 수 있도록 홍살문에서 왕릉 앞의 정자각에 이르기까지 만들어 두었던 길로.

  전석(塼石) 형식의 박석(薄石)이 길게 놓여져 있으며, 신도(神道)와 왕도(王道)는 높이로 구분된다.

*예전에는 왕도(王道) 옆으로 관광객 등 일반인이 밟고 다니던 좁은 흙길이 우측 잔디밭 쪽으로 나있었는데,

  장릉 경내 잔디 식재 작업을 하면서.. 돌을 깔아 만든 참도(參道) 옆 쪽 길은 경사진 면으로 없어진 것 같다.

*신도로 걷거나 참도를 건너서는 안되며, 부득이 참도 위를 건너게 될 때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건너야 한다. 

 

헌관들이 입장하고.. 이어 유생차림의 집사들이 뒤따라 들어오고 있다.

 

 

단종제례는 4월 6일 한식날 한 번 있고, 4월 27일은 단종문화제 행사로 매년 한 번 더 진행된다고 한다. (*유교신문 참조)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로 시작하여 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진찬례(進饌禮),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제기(祭器)를 덮는 철변두(徹邊豆),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을 보내는 송신례(送神禮) 순서로 치러진다.

 

초헌관(初獻官) 영월군수, 아헌관(亞獻官) 영월군의회의장, 종헌관(終獻官) 영월교육장이..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린다.

 

 

보호수인 오래된 느티나무 주위로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王陵)에 비하여 높은 구릉에 모셔져 있는데,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 정자각, 참도, 홍살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곳 장릉의 경우 신좌을향(辛坐乙向.. 南西를 등지고 北東向으로..)으로 모셔져 있고,

정자각(丁字閣)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정자각에서 높은 구릉 위에 있는 능묘의 옆쪽을 향해 절을 할 수밖에 없다.

 

*정자각 우측에는 돌로 만든 작은 함(函)을 만들어 놓았다. 이른바 소지석(燒紙石)이다. 이를 석함(石函)이라고 한다.

 이는 제사 후 축문(祝文)을 태우는 곳이다. (*문화콘텐츠닷컴 자료 참조)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된 것은 1457년이다. 정순왕후와도 생이별이다.

한양을 벗어나 여주, 원주, 신림, 주천을 거쳐 청령포에 도착했다. 삼면은 급류가 흐르는 강이며,

뒤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니 갈 곳 없는 귀양지다. 홍수로 강물이 넘쳐 처소를 관풍헌으로 옮겼지만

끝내 사약을 받고 17살로 생을 마쳤다.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당시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금봉연(金鳳淵)에서 남몰래 거둬 동을지산(冬乙旨山)에 평토장(平土葬)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을지산(東乙旨山) : 서쪽(辛方)을 등지고 동쪽(乙方)을 향한 산자락.  *旨 : 어조사(語助辭)

*금봉연(金鳳淵) : 동강과 서강이 합치는 합수거리 강 건너 팔계 쪽의 병창 밑에 있는 소(沼) 

 

배(拜)~흠(歆)~ 집례의 소리에 맞추어.. 네 번 절하고.. 흠향.. 흠향(歆饗)은 신명(神明)이 제물(祭物)을 받음을 이른다.

 

 

육일무 대기 천막으로 다시 와서.. 속에 입는 하얀 민복에 빨간 도포로 갈아입고.. 관까지 쓰는데..

 

 

문무는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라고도 하며, 무원의 복장은 홍주의((紅紬衣)에

남사대(藍絲帶)를 띠고 목화(木靴)를 신으며, 머리에는 진현관(進賢冠)을 쓴다.

 

*홍주의(紅紬衣)는 붉은색 두루마기의 일종으로, 조선후기 악공관복(樂工冠服)의 하나
*남사대(藍絲帶)쪽빛 명주실로 만든 띠로 악무(樂∙舞)의 연주 때 복식의 하나로 쓰였다.

*목화(木靴)는 조선 중·후기 관복에 신던 신. 바닥은 나무이고 신목은 천으로서

  전이나 가죽·융 또는 금단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진현관(進賢冠)은 문관이나 유생이 쓰던 관으로,  천으로 만들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2단으로 되어 있고 양쪽에 끈을 달아 턱밑에서 묶게 되어 있다.

 

역시.. 두상이 작은 터라 관이 벗겨져..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다. ㅎ

 

 

빨간색 도포 차림으로 모여 서니.. 숲속에 목단 꽃이 핀 듯 화려해진다. *^^

 

 

단체로 기념사진부터.. 폰카로 찍는 뒤쪽에서 디카로 촬영.. (*아래 단체 사진은 클릭하면 좀 더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음)

 

 

다시 줄을 맞춰 서서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하는데..

 

 

군대를 안 갔다 온(?).. 여성분들이라.. 줄 맞춰 입장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일무 [佾舞]

일(佾)은 열(列)과 같은 뜻으로 일무는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서 일무를 춘다.

일무는 지위에 따라서 팔일무, 육일무, 사일무, 이일무 등 네 종류가 있으며, 육일무(六佾舞)는 36명이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佾 [줄 춤 일] 1. 줄 춤 2. 춤 줄(춤을 출 때 늘어선 줄  *舞 [춤출 무] 1. 춤추다.. 4. 북돋다 5. 고무하다(鼓舞--).. *한자사전 참조

 

일무 [佾舞]

일(佾)은 '춤의 벌여진 줄'이라는 뜻으로, 제례의 대상에 따라 8일무·6일무·4일무로 구분된다. 즉 천자(天子)는 8명씩 8줄로 늘어선 64명의 8일무로 하고, 제후(諸侯)는 6명씩 6줄로 늘어선 36명의 6일무, 대부(大夫)는 4명씩 4줄로 늘어선 16명의 4일무, 사(士)는 2명씩 2줄로 늘어선 4명의 2일무로 춘다. 공자(孔子)의 제사인 문묘제례에는 8일무를 하고, 조선 역대왕의 제사인 종묘제례 때는 6일무를 하였는데, 고종 때 종묘제례가 8일무로 승격되었다.

 

문묘의 일무는 본고장 중국에서는 소멸된 지 오래이나 한국에서는 고려 예종 때 전래된 이래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종묘의 일무는 조선 세조 때 창제되어 전승되어 왔다. 이 두 일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문무(文舞)와 무덕(武德)을 칭송하는 무무(武舞)로 구분된다. 이 기능 보유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김천흥(金千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무 [佾舞] (두산백과)

 

 

주악과 박(拍) 소리에 맞추어 왼손에는 지공(指孔) 3개를 뚫어 만든 악기인 약(籥)을,

오른손에는 나무를 꿩 깃털로 장식한 적(翟)을 들고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춘다.

 

*약(籥)은 구멍이 세개 있는, 세로로 부는 악기의 하나이며, 적(翟)은 ㄱ자 모양의 막대기 위에

  용의 머리가 달렸고, 용의 입에 달린 쇠고리에 새의 깃(羽)으로 장식된 유소(流蘇)가 달렸다.

  유소(流蘇)는 명주실로꼬아 짠 끈목으로 매듭을 맺어 그 끝에 색실로 술을 드리운 것이다.

 

 

*약(籥)과 적(翟)은 평화를 상징한다. 현재는 종묘제례악 중 영신(迎神)·전폐(奠幣) 및

  초헌(初獻)의 예를 올릴 때 추는 문무와 문묘제례악의 일무인 문무에 사용된다.

 

 

뒤에서 보면.. 뭔가 안 맞는것 같기도 하더니..

 

 

벌을 서 듯.. 손을 들고 나서는..

 

 

선생님에게 인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춤사위는 음악이 시작되면 오른발을 들며 양팔을 들어 어깨에 메는 시늉을 하다

바로 허리를 굽히며 양팔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하는데, 먼저 북쪽을 향하고 이어

서쪽·동쪽, 다시 북쪽을 향하여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천천히 왼 팔을 올리고 나서..

 

 

또 앞으로 나란히 자세다. *^^*

 

 

두 팔을 벌려 하늘 높이 들어 올리다가..

 

 

양 팔을 어깨와 수평으로 넓게 벌린다. *^^*

 

 

앞으로 넘어질 듯 구부정한 자세는.. 어려워 보이지만..

 

 

앞으로 나란히.. 자세는 모두들 잘 하는 것 같다.

 

 

사진작가들은 멋진 장면에.. 가까이 가서.. 연신 셔터를 누르는데.. 그 뒤에서 눈치 못 채게.. 조용히(?) 찍는다.

 

 

오른쪽으로 우향우.. 줄이 제법 잘 맞는다. *^^

 

 

연습을 마치고.. 선생님과 기념사진..

 

 

누구 남편이라고.. 얼굴을 알아 본 사람들이 있어.. 개인 사진 몇 장 더 찍었다. ㅎ

 

 

오전 11시경.. 홍살문 입구 쪽으로 줄 맞춰 이동..

 

 

일단, 홍살문 앞에서 대기.. *홍살문(紅箭門)은 능(陵)·원(園)·묘(廟)·관아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이다.

 

 

단종제례를 마친 뒤.. 영월다도회 회원들의 헌다례(獻茶禮)가 진행된다.

*헌다(獻茶)는 신불(神佛)에게 차를 올림. 또는 그런 일을 이르는 말임..

 

 

어제는 그리 춥더니.. 오늘은 하늘도 맑고 햇볕이 뜨거워.. 장판옥(欌版屋) 그늘로 옹기종기 모인다.

*장판옥(欌版屋)은 단종과 관련된 충신과 조사, 환자군노, 시녀 등 268인의 위패를 모셔 둔 집이다.

 

 

헌다례(獻茶禮)를 마칠 즈음.. 제례악 소리가 장릉에 울려 퍼진다.

 

 

제례악이 들리자.. 모두들 긴장하는 것 같다.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의 제례악..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국악 연주 모습이다.

 

 

단종제향을 마치고.. 영월문화원장이 육일무 팀을 찾아와 격려한다.

 

 

영월문화원장과 같이 온.. 동창 친구의 부친이 오래전 작고하신 초대 영월문화원장님이다.

 

 

헌다례가 모두 끝나고.. 영월 다도회 회원들이 내려오고 있다.

 

 

은사인 선생님을 여기서 만나니.. 반가워하며 손을 잡는다. *^^

 

 

이제는 한 눈 팔 겨를이 없다.  똑바로 줄 서서 대기.. *^^

 

 

육일무에 이어 소품 발표를 할 어린이들.. 귀여운 모습에 절로 미소기 지어진다. *^^

 

 

드디어 육일무 팀 입장.. 미니 마이크를 휴대한 선생님이 뒤에서 조용한 소리로 발걸음 신호를 해 준다.

 

 

육일무를 제대로 선보이려는 듯.. 의연한 걸음이다.

 

 

여섯 명씩 일렬로 줄을 이루어.. 정자각 앞 넓은 마당을.. 삼십육 명이 가득 채우려 한다. *^^*

 

 

문무를 출 때에는 오른손에 적(翟), 왼손에는 약(籥 : 구멍이 세 개 있는, 세로로 부는 악기의 하나)을 들고 춘다.

적은 나무로 만든 자루[柄]에 용두(龍頭)를 달고, 용두에 유소(流蘇)를 늘어뜨린다.

적(翟)과 약(籥)은 평화를 상징한다. 현재는 종묘제례악 중 영신(迎神)·전폐(奠幣) 및 초헌(初獻)의 예를 올릴 때 추는

문무와 문묘제례악의 일무인 문무에 사용된다.

 

적[ 翟 ]  무무(武舞)를 출 때 오른손에 드는 무구(舞具). 
'적'은 왼손에 드는 약(籥)과 한 짝이다. 제례의식 때 공연된 일무(佾舞)의 무원(舞員)이 들고 춤을 춘 '적'은 ㄱ자 모양의 막대기 위에 용의 머리가 달렸다. '용'의 입에 달린 쇠고리에 새의 깃(羽)으로 장식된 유소(流蘇)가 달린 의식구(儀式具)였다. 문무원(文舞員)이 오른손에 '적'을, 그리고 왼손에는 '약'을 들고 춤을 추었다.

조선초기의 보태평정재(保太平呈才) 공연 때 여기(女妓)가 '적'을 잡고 춤을 추었다. 현재 '적'은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의 연주 때 일무원(佾舞員)이 잡고 추는 무구이다. '적'은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의 악공이 춤을 출 때, 오른손에 드는 무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적 [翟]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송방송)

 

약[ 籥 ]  아악기(雅樂器)의 하나. 일명 위약(葦籥).  
죽부(竹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phone)에 드는 이 악기는 예로부터 악기로 쓰이기보다는 일무(佾舞) 공연 때 의물(儀物)의 하나로 사용됐다. 이 관악기는 대나무가 아닌 갈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위약이라 불렸다.

『고려사』 권71(「악지」)에 의하면, 1116년(예종 11) 송나라로부터 처음으로 고려에 소개된 약은 문무(文舞)의 무구(舞具)로 사용됐다. 약의 그림은 『세종실록』 권128에 처음으로 보이고, 약의 지공법(指孔法)에 대한 도설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6에 전한다.
즉 '약'은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의 악공이 춤을 출 때, 왼손에 드는 일종의 관악기다. 무원(舞員)의 왼손에는 '약'을 잡고 오른손에는 적(翟)을 잡는다. "보태평"의 여기(女妓) 36명은 모두 단장에 잡식(雜飾)하고, '약'과 적을 들고 손을 여미며 선다. 성종(1469~1494) 때 약은 적(翟)과 함께 아악의 헌가와 등가에 모두 편성됐고, 그 후로부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현행 문묘제향(文廟祭享) 때 문무원(文舞員)은 약을 왼손에 들고 적(翟)을 오른손에 들고 일무를 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약 [籥]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송방송)

 

*翟(꿩 적) : 1. 고서(古書)에서 꽁지가 긴 꿩을 가리킴. 2. 꿩의 깃털. 무적(舞翟). [옛날의 무용 도구]

 중국(中國)의 일무(佾舞)에서 문무(文舞)를 할 때 춤을 추는 사람이 오른손에 잡고 추던 도구(道具).

 용머리를 조각(彫刻)한  짤막한 나무 자루 끝에 용알과 암꿩의 꼬리털을 꽂아 맴.

 우리나라의 아악(雅樂)에서는 용머리의 턱밑에서부터  깃털로 만든 5층의 술을 입에 물리어 늘이었음

*籥(피리 약) : 피리(악기의 하나) 

 황죽(黃竹)으로 만든 중국 고대의 악기. 단소처럼 생겼으며 구멍은 세 개 또는 여섯 개이고

 세로로 불게 되어 있는데,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지금은 문묘 제례악에 쓴다.

 

 

菲儀尙可交  비의상가교..  《전폐희문(奠幣熙文)》이 연주되고..

 

 

변변치 않은 물건이오나 가히 정을 통하옵기 바라오며..

 

 

承筐將是帛  승광장시백..

 

 

광주리 받들어 이 폐백을 올리나이다..

 

 

先祖其頣歆  선조기고흠..

 

 

선조께옵서 이를 즐거이 받아들이시면..

 

 

式禮心莫莫 심례심막막..

 

 

공경히 예를 드리는 이 마음 편안하겠나이다..

 

 

전폐례((奠幣禮).. 폐백의 제순(祭順)인.. 육일무를 마치며 인사를 드린다.

*전폐(奠幣)는 제사 때에 헌관(獻官)이 집사자에게 폐백을 받아서 신위(神位) 앞에 드리는 일.

 

*奠 [정할 전,제사 전] : 1. (터를)정하다(定--) 2. 제사(祭祀) 지내다 3. 제물(祭物)을 올리다

*幣 [화폐 폐] : 1. 화폐(貨幣) 2. 비단(緋緞) 3. 폐백(幣帛)  *한자사전 참조

 

전폐례(奠幣禮)는 제례(祭禮)에 헌관(獻官)이 삼상향(三上香) 하고 신주(神主) 앞에 폐백(幣帛)을 드리던 예(禮)이다.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비단을 폐백(幣帛)이라 하고, 삼상향은 분향(焚香) 할 적에 향을 세 번 불에 사르는 일이다.

 

 

<전폐희문>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菲儀尙可交  비의상가교   엷은 예로 올리오니 마음 열어 주옵소서
承筐將是帛  승광장시백   광주리에 담아 여기 폐백 받들어 올립니다

先祖其顧歆  선조기고흠   선조께서 돌아보사 흠향 즐겨 듭시오면
式禮心莫莫  식례심막막   공경하여 올린 예로 마음 맑고 고요하리

 

 

뒤 줄부터 나서는데.. 영월문화원장이 지켜보고 있다가.. 잘했다고 손짓한다.

 

 

육일무 팀이 나오면서.. 아래쪽으로는 소품 발표할 어린이들이 들어오고 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귀여운 춤.. (*제1회 단종제 때.. 저 자리에서 팽이춤을 추웠는데..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육일무 재현을 마치고 나니.. 홀가분한 분위기다.

 

 

낮 12시경.. 서둘러 대기 천막으로 돌아와.. 의상을 갈아입고.. 장릉 인근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후 해산이라고 한다.  

 

 

12시 30분경 큰 느티나무 아래에 혼자 앉아.. 쿠키 등 간식을 먹고 장릉을 나서는데.. 파란 하늘이 그리 예쁠 수 없다. *^^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 종묘 제례 때에 추던 일무(佾舞)의 하나. 36명의 무기(舞妓)가

주악과 박(拍) 소리에 맞추어 왼손에 약(籥)을, 오른손에 적(翟)을 쥐고 춘다. ≒보태평무.

 

 

 

희문(熙文)은 현행 종묘제례악 중 영신(迎神)·전폐(奠幣) 그리고 초헌의

인입장(引入章)에 연주되는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의 첫 곡

 

*보태평(保太平) : 태평(太平)을 보존(保全)하다라는 뜻.

*태평(太平) :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없고 편안함

『시용무보』 소재 보태평지무의 "희문"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중 전폐희문(奠幣熙文)

 

종묘제례(宗廟祭禮) 중 전폐(奠幣: 예물인 비단을 올리는 절차)에서 연주되는 악곡.

전폐례에서 희문(熙文: 「보태평(保太平)」 11곡 중 첫 번째 음악)의 선율이 연주되므로,

‘전폐’와 악곡명 ‘희문’을 결합하여 ‘전폐희문’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폐희문 [奠幣熙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菲儀尙可交   비의상가교    변변치 않은 예물이나 받아주시기 바라오며,

承筐將是帛   승광장시백    광주리에 받들어 여기에 비단을 올리나이다.

先祖其顧歆   선조기고흠    선조께옵서 이를 돌아보시어 받아 주시오면,

式禮心莫莫   식례심막막    공경히 예를 드리는 이 마음 편안하겠나이다.

 

*위 우리말 풀이는 영월박삿갓 개인적인 해석으로 상이(相異) 할 수 있음.
 (한자사전 및 인터넷 검색 자료 등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풀이한 것임)

 

菲 [엷을 비] 1. 엷다, 박하다 2. 엷게 하다

儀 [거동 의] 1. 거동(擧動) 2. 법도(法度) 3. 법식(法式) 4. 본보기 5. 예절(禮節) 6. 선물(膳物)

尙 [오히려 상] 1. 오히려 2. 더욱이 3. 또한 4. 아직 5. 풍습(風習) 6. 풍조 7. 숭상하다(崇尙--)

可 [옳을 가,오랑캐 임금 이름 극] 1. 옳다 2. 허락하다(許諾--) 3. 듣다, 들어주다 4. 쯤, 정도 5. 가히

交 [사귈 교] 1. 사귀다, 교제하다(交際--) 2. 오고 가다 3. 주고 받다, 바꾸다

 

承 [이을 승,구원할 증] 1. 잇다,  2. 받들다 3. 받다, 받아들이다 2. 받들다 3. 받다, 받아들이다

筐 [광주리 광] 1. 광주리 2. 평상(平床: 네모진 침상) 3. 작은 비녀(여자의 쪽 찐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將 [장수 장,장차 장 1. 장수(將帥), 인솔자(引率者) 2. 장차(將次) 3. 문득 4. 청컨대 5. 무릇, 6. 만일(萬一), 만약(萬若),

是 [이 시,옳을 시] 1. 이, 이것 2. 여기 3. 무릇 4. 이에(접속사) 5. 옳다, 바르다 6. 바르게 하다

帛 [비단 백] 1. 비단(緋緞), 견직물(絹織物) 2. 명주(明紬: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피륙) 3. 폐백(幣帛)...

*폐백(幣帛)이란 고인에게 예물로 바치는 비단이란 뜻이다.

 

先祖 [선조] 할아버지 이상(以上)의 조상(祖上)

其 [그 기] 1. 그, 그것 2. 만약(萬若), 만일(萬一) 3. 아마도, 혹은(或-: 그렇지 아니하면

顧 [돌아볼 고] 1. 돌아보다 2. 지난날을 생각하다 3. 돌보다 4. 당기다 5. 돌아가다 6. 품을 사다(雇)

歆 [흠향할 흠] 1. 흠향하다(歆饗--), 제물(祭物)을 받치다 2. 부러워하다

 

式禮 [식례] ①예의(禮儀) :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 ②의식(儀式)

心 [마음 심] 1. 마음, 뜻, 의지(意志) 2. 생각

莫 [없을 막,저물 모,덮을 멱] 1. 없다 2. 말다, ~하지 말라 3. 불가하다 4. 꾀하다(=謨) 5. 편안하다(便安--),

 

 

참고 자료 (*인터넷 검색 자료)

 

제례절차와 악장구성

종묘의 제례 절차에서 사용하는 악곡과 악장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관례(晨痙禮)의 악장
신관례를 올릴 때 전폐를 올리는데, 전폐는 조상신이 강신(降神)한 신단에 폐백(幣帛)을 올리는 예를 말한다. 집례가 “등가작보태평지악 보태평지무작(登歌作保太平之樂 保太平之舞作), 등가에서 보태평의 악을 연주하고 일무원은 보태평무를 추시오.” 라고 창홀하면, 등가에 있던 악사들은 <보태평지악>을 연주하고, 일무원들은 보태평지무를 춘다. 그러나 전폐에 쓰는 <보태평지악>은 영신례에서처럼 <보태평> 11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전폐희문(奠幣熙文)> 한 곡을 지칭한다.

 

이 곡은 <영신희문>이나 초헌례의 인입장인 <희문>과 비교해 볼 때, 악장의 형식은 5언 4구로 같으나, 악장의 내용은 <영신희문>처럼 초헌례의 <희문>과 다르다. 영신의 <희문>이 조상신에게 제사 올림을 고하는 내용이고, 초헌례의 <희문>이 조상의 문덕을 칭송하는 내용인 것에 비해, <전폐희문>의 악장은 정성스럽게 준비한 폐백을 받아 달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폐희문>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 【번역문】

비의상가교 승광장시백 엷은 예로 올리오니 마음 열어 주옵소서
菲儀尙可交 承筐將是帛 광주리에 담아 여기 폐백 받들어 올립니다

 

선조기고흠 식례심막막 선조께서 돌아보사 흠향 즐겨 듭시오면
先祖其顧歆 式禮心莫莫 공경하여 올린 예로 마음 맑고 고요하리

[네이버 지식백과] 제례절차와 악장구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종묘제례악),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전폐희문

종묘제례악 중 한 곡. 예의를 갖추어 물건을 올리는 절차인 전폐에 연주하는 희문은 본래 보태평 중의 한곡이었으나 〈전폐희문〉이라는 독립된 악곡이 되었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가운데 한 곡이다. 종묘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로 시작하여 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진찬례(進饌禮),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제기(祭器)를 덮는 철변두(徹邊豆),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을 보내는 송신례(送神禮) 순서로 치러진다.

 

이 절차의 두 번째인 전폐례가 댓돌 아래[軒架]에서 행해질 때 댓돌 위[登歌]에서는 보태평 중 ‘전폐희문’을 연주한다. 전폐희문은 영신례의 희문과 같은 곡이지만 전폐희문의 템포가 훨씬 느리다. 도창(노래부르는 이)은 전폐희문의 악장을 노래하고, 일무는 문무(文舞)를 춘다. 종묘제례악을 무대에 올릴 때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폐희문 (국악정보, 2010. 7., 국립국악원, 전라북도)

 

일무 [ 佾舞 ]

중국 주(周)시대 때부터 전하는 아악의 대표적인 춤으로 일(佾)은 열(列)과 같은 뜻으로 일무는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을 말하며 우리나라에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서 일무를 춘다.  

 

일(佾)은 열(列)과 같은 뜻으로 일무는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서 일무를 춘다. 일무는 지위에 따라서 팔일무, 육일무, 사일무, 이일무 등 네 종류가 있다. 현재는 팔일무를 추고있다.

 

팔일무란 8열 8행으로 64명이 추는 일무를 말하며, 육일무는 6열 6행 36명, 사일무는 4열 4행 16명, 이일무는 2열 2행 4명의 무용수가 추는 춤이다. 팔일무는 천자(天子)에 쓰이고, 육일무는 제후(諸侯)에, 사일무는 대부(大夫), 그리고 이일무는 선비(士)에 각각 쓰이던 고대 무용의 제도이다.

 

종묘제례악무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군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 제례에 쓰이는 춤으로 세종때 회례악무로 창작되었는데, 세조 때 종묘제례악에 사용되어 현재에 이른다. 종묘 제례의 일무는 문무와 무무로 나뉘는데 문무는 보태평지무라고 하고 무무는 정대업지무라고도 한다.

 

보태평지무는 조종의 문덕을 칭송하는 춤으로 왼손에는 약을 오른손에는 적을 들고 춘다.

 

정대업지무는 조종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두 손에 목검 또는 목창 혹은 목궁시를 들고 추는 것이 문무와 다르고 춤사위도 다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시용무보에는 오른손에 목검을 들고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종묘의 일무는 문묘의 일무와는 달리 분명한 무보가 있어서 무보에 의거해 엄격히 추어져 왔다.

 

문묘일무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 자사와 같은 중국의 성현과 설총 · 최치원과 같은 우리나라 성현을 제사하는 문묘제향에 쓰이는 춤이다. 문묘제례에도 문무와 무무가 있는데, 영신 · 전폐 · 초헌례에 추는 문무는 왼손에는 약, 오른손에는 적을 들고 춘다. 음악이 시작되면 오른발과 함께 양팔을 들어 어깨에 매는 시늉을 하다 바로 허리를 굽히며 양팔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하는데, 먼저 북쪽을 향하고 이어 서쪽 · 동쪽 · 북쪽의 순서로 동작을 반복한다.

 

무무는 아헌 · 종헌례에 추는 춤으로 왼손에 간(방패), 오른손에 척(도끼)을 들고 춘다. 춤사위는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준비 자세를 취한 후, 음악이 시작되면 먼저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다음 양 손을 벌려 오른손을 머리위로 들었다가 척으로 간을 내리치는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종헌에서는 아헌에 추어지는 춤동작과 같으나 왼쪽으로 한 바퀴 돈 후에 양 팔을 벌려 내리치는 것이 다르다.

 

이 문묘일무는 중국에서는 없어진지 오래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적 연원이 오래된 의식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무 [佾舞] (국악정보, 2010. 7., 국립국악원, 전라북도)

 

일무[ 佾舞 ] 제례의식 때 공연된 의식무용(儀式舞踊).  
제향(祭享) 때 의식절차에 따라서 공연되는 일무의 무원(舞員)의 숫자는 신주(神主)의 지위에 따라서 결정된다. 천자(天子)의 제향에서는 64명(8열×8명)의 팔일무(八佾舞)가 공연됐고, 왕(王)이나 제후(諸侯)를 위한 제사 때에는 36명(6열×6명)의 육일무(六佾舞)가 공연됐다. 사대부(士大夫) 제향 때에는 16명(4열×4명)의 사일무(四佾舞)가 공연됐고, 보통 선비의 제사 때에는 4명(2열×2명)의 이일무(二佾舞)가 공연됐다.

종묘제향(宗廟祭享) 때의 일무는 세종(1418~1450) 때 제정됐고, 세조(1455~1468) 때 개작됐다. 종묘일무(宗廟佾舞)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뉜다. 문무는 영신(迎神)·전폐(奠幣)·초헌(初獻) 절차에서 연행되고, 무무는 아헌(亞獻)·종헌(終獻) 절차 때 공연된다.

 

문무와 무무의 연행 때 무원(舞員)들은 손에 의물을 들고 춤을 춘다. 그 의물은 문묘일무(文廟佾舞)와 종묘일무(宗廟佾舞)의 경우 서로 다르다. 문묘의 문무원(文舞員)은 오른손에 약(籥)을 들고 왼손에 적(翟)을 들고 춤을 추고, 무무원은 오른손에 간(干)을 들고 왼손에 척(戚)을 들고 춤을 춘다.

 

종묘의 문무원은 오른손에 소(簫)를 들고 왼손에 약(籥)을 들고 춤을 추지만, 무무원(武舞員)의 앞 세 줄은 검(劍)을 들고 뒤 세 줄은 창(槍)을 들고 춤을 춘다.

 

일무의 반주음악은 문묘의 경우 "응안지악"(凝安之樂)·"명안지악"(明安之樂)·"서안지악"(舒安之樂)·"성안지악"(成安之樂)이 쓰였고, 종묘(宗廟)에서는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이 연주됐다. 오늘날 일무는 종묘제향 및 문묘제향(文廟祭享) 때 연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무 [佾舞]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송방송)

 

단종문화제

 

 

단종제(端宗祭)는 조선제 6대 임금인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킨 영월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제이다.

 

1967년에 "단종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축제는 1990년 제24회 때부터 "단종문화제"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사시기는 원래 매년 4월5일 한식일을 전후하여 3일동안 계속 되었으나, 한식무렵이면 날씨가 고르지 않아 방문객편의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4월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3일간 행사를 치르고 있다.

 

단종문화제는 평창, 정선 주민들은 물론 인근 경상북도, 충청북도 군수들까지 참배를 하였고 조선시대 국장재현, 칡줄다리기, 가장행렬, 정순왕후 선발대회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펼쳐진다.

 

 

원래 조선조 6대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추방, 다시 서인으로 되어 1457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한 많고 애달픈 일생을 마친 역사와 그 사적을 추모하고 기린다.

 

숙종 24년(1698년) 이후 270년 동안 제향(祭香)만으로 그치던 것을 1967년 지방 유지들과 관의 뜻을 합쳐 각종 문화행사를 겸한 향토문화제를 거행하기로 하고 날짜는 제향(祭香)을 올리던 한식일로 잡았다.

 

단종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 즉 충의를 실천궁행(實踐躬行)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실제 객지에 장기간 다녀오면 으레 단종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어 군민의 충효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의 지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제향

매년 단종문화제 행사 시 영월군에 위치한 세계유산 장릉에서 단종대왕께 드리는 유교적 제례의식 (강원도 무형문화제 제22호)

 

※ 위 단종문화제 관련 자료 및 이미지 출처 :영월군 단종문화제 홈페이지 참조 

 

 

※ 특별히 아래에 옛 단종제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열입곱살 나이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간 단종.. 단종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1967년도이니.. 당시 영월공고에 다니던.. 영월박삿갓의 나이가 열일곱살 때이며,

그때 단종제에서 팽이춤을 추었던 집사람은.. 석정여중 2학년 재학중이었습니다. ㅎ

 

※ 아래 사진들은 1967년 한식날 제1회 단종제에서 제사를 지낸 후 팽이춤을 추었던 사진으로,

    53회인 이번 단종문화제에서는 팽이채를 잡았던 손에 적과 약을 잡고 육일무를 추었습니다. ㅎ

 

 

 

※ 아래 단종제 사진 5매는 인터넷 검색으로 영월 옛 사진을 켑처하여 옮겨온 것입니다.

 

옛 단종제 때의 능말로 올라가던 신작로의 모습입니다.
단종(端宗) 임금의 능이 있는 곳이므로 '장릉(莊陵)' 또는 '능마을 → 능말' 이라고 하였고,.
도랑 건너 안산 아래에도 장릉 연못으로 이어지던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따라 단종제 구경하러 올라가던 사람들의 옷차림이 예스럽습니다.

 

 

당시 장릉은 담장이 없고, 소나기재로 이어지는 길에 마이크로버스와 트럭이 보이고,
장릉 솔밭은 구경나온 사람들로 가득하고 신작로 가에도 사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정자각 주위와 능이 있는 산 능선까지 구경 온 사람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정자각 뒤에서 능으로 바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장릉 정문 입구에서 오른쪽 배견정 능선을 따라 새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배견경(拜鵑亭)은 장릉 정문 우측 산기슭의 거북이 형상을 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사육신 박팽년의 혈손 박기정이 1792년에 창건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이 앞에 연못이 있었으며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넑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의 묘소를 찾아와 단종 대왕의 영혼에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합니다.

 

 

철도다리 아래 동강변에서 동서 양편이 줄다리기를 하던 모습입니다. (*위 장릉 사진들은 초기 단종제 사진 같고,

아래 동강변에서 줄다리기하는 사진은 플래카드에 단종문화제라는 글자가 보이니.. 1990년대 초인 것 같습니다.)

 

제1회 단종제 때 줄다리기는 영월경찰서 앞 도로에서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동강 동편에 살던 덕포 주민과,

동강을 중심으로 동강다리 서편에 살던 주민이 인원 제한 없이 참가하여 실제로 줄다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현 영월문화예술회관 자리에 영월군청이 있었고, 현 영월농협 자리에 영월읍사무소가 있었습니다.

군청에서부터 읍사무소까지 긴 칡줄은 음양에 따라 동편이 수줄을 만들고 서편이 암줄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산에서 칡줄을 걷어오는것 부터가 행사의 시작으로, 칡를 다듬고 가늘게 꼬아 다시 크게 모아 꼬는데

한 편의 길이가 50m, 굵기가 약 60Cm에 이르렀고, 굵은 칡줄에 갈래 갈래 가는 줄에도 주민들이 붙어 당겼습니다.

 

동편에서 만들어진 칡줄은 동강다리를 건너오는데.. 칡줄 행렬 앞으로 부녀자가 지나지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암,수 형태로 만들어진 칡줄은 용두목으로 암,수줄을 결합하여 양편이 승부를 겨루었던 흥겨운 놀이였습니다.

 

 

단종제향 시 배식단(配食壇)에 제물을 차려 놓고 충신위 등 영령을 추모하는 제사를 같이 지내던 모습입니다.

 

 

※ 아래 사진 3매는 *박영국 엮음<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영월을 찾아서'에 실린 사진을 다시 촬영한 것입니다.

 

 • 단종제향 전경   왼쪽에 헌관이 도열하고 있다.

 

 • 단종제향의 헌무 광경   80명의 학생이 고전무용으로 헌무하고 있다.

 

 • 장릉 (사적 제196호)   홍살문, 정자각과 비각, 산상의 능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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