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정 벚꽃 나들이

박삿갓의 일상사 모음 2016. 4. 14. 10:00

꼭 2 년 만에 금강정(錦江亭)을 찾아왔다. 다음날은 투표도 해야 되고, 비도 온다니 벚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ㅎ

 

 

금강공원 싱그런 솔밭에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데..  오랜 세월 탓인가.. 고사(枯死)된 소나무도 보이고..

 

 

어릴 적 부터 보던.. 건강했던 소나무.. 이제는 받침대를 받치거나, 나무주사를 매달고 있는 소나무도 보인다. 

 

 

벚나무도 밑동을 보니 거의 고목이 다 되어 떨어진 하얀 꽃잎마저 애처롭게 보인다. ㅠ,ㅠ

 

 

그래도 검고 투박한 나무껍질 사이로 연초록 새움이 자라고 있다. *^^

 

 

이 부근 큰 소나무 밑에 자라던 작은 소나무들도 어찌 된 일인지 많이 없어졌다. ??

 

 

벚꽃(Cherry Blossom)
꽃말 순결, 절세미인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무척 닮아있다. 인간이 젊음의 한 순간을 정점으로 늙어가듯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던 화려한 꽃 역시 조용하고 쓸쓸하게 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벚꽃은 피어 있는 모습이 화려해 일본에서는 매년 '꽃놀이(하나미)'를 즐길 정도다.
피어 있는 모습 못지않게 떨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꽃. 꽃잎이 유독 얇고 하나하나 흩날리듯 떨어져,
꽃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또 금세 활짝 피어 화려하게 물드나 싶다가 봄비가 내리면 잎만 푸르게 남는다.
잠깐 숨 돌리는 사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 느끼는 덧없음이랄까.
이렇듯 짧고 화려하기에 더욱 더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는 것이겠지.

[네이버 지식백과] 벚꽃 [Cherry Blossom] - 가장 아름다운 순간 (쁘띠 플라워, 2010.4.20, ㈜살림출판사)

 

 

어느 어린아이가 벚꽃이 핀 걸 보고 나무에 팝콘이 달렸다고 했던 말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ㅎ

 

 

공원 뒤 편의 벚나무도 한 그루가 말라버린 것 같고, 뒤쪽으로 보이는 발산은 옛 이름 그대로 삼각산이다.

 

 

벚꽃에 둘러싸인 금강정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강 건너편 우리 동네 아파트는 몇 년 전 도색을 새로 했고.. ㅎ   

(* 아래 금강정 사진은 클릭하면 좀 더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음)

 

 

금강정(錦江亭)  뒤편 낮은 언덕 위에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예전 금강정 포도밭은 초록빛 초원으로 변했지만, 강 건너 계족산(鷄足山)은 여전히 뾰족뾰족한 모습이다.  

그 형상이 닭의 발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6개인데 닭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서 계족산이라고 한다.

 

오른 편으로 데크길을 따라가면 '월기경춘순절처'라는 비석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낙화암 표석과 순절비가 있다.

 

 

낙화암((落花巖)은 금강정 쪽 동강의 높은 절벽 위에 있는데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이곳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
이들이 투신 순사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두 곳의 낙화암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의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부여의 백마강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곳 영월의 낙화암이다. 금강정 절벽에 동쪽으로 있는 마지막 절벽이 낙화암이다.

 

단종이 복위된 후 영조18년(1742년) 영월부사 홍성보(洪性輔)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일대 절벽 위쪽에

‘낙화암’이라는 비석을 세웠으나  일제 때인 1910년 일본인들이 비석을 파괴해 강물에 버렸고  

2년 뒤 당시 영월군수 이석희씨가 다시 세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낙화암’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여년간 지역 단종관련 유적들을 관찰해온

엄태일(71세)에 의해 낙화암 암각 글자가 발견되면서 정확한 장소를 알게되었다고 한다.

 

 

영월 낙화암[ 寧越 落花巖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39번지 금강공원 내에 있는 절벽으로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이곳에서 투신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영월에 유배되었던 단종(端宗)이 1457년(세조 3) 10월 24일 17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와 시종들이 이 절벽에 올라
금장강(錦障江, 동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의 시신도 이곳에서 강으로 던져졌다 한다.

1742년(영조 18) 낙화암 근처에 사당 민충사(愍忠祠,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7호)를 지어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당시 영월부사 홍성보(洪性輔)가 절벽 위쪽에 ‘낙화암(落花巖)’이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은 1910년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고,
현재의 비석은 1912년 다시 세운 것이다.

금강공원의 금강정(錦江亭,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에서 동쪽으로 약 200m 거리에 비석이 놓여 있다. 한편 2008년에 비석과
금강정 중간 지점의 절벽 약 10m 아래 지점에서 ‘낙화암’이라 새겨진 오래된 암각문이 발견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낙화암 [寧越落花巖] (두산백과)

 

 

※ 아래는 낙화암 부근 절벽(영월 말로 뼝창)에 '落花巖'이라 새겨진 암각문으로,

    글자 한 자의 크기가 가로 X 세로 약 1m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 자료)

 

 ▼ 1742년(영조 18)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가 낙화암 절벽에 새긴 ‘落花巖’ 세 글자

 

 

▼ 1746년 (영조 22)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창렬암(彰烈巖)이라는 암각문 세 글자를 낙화암 암벽(巖壁, 병창)에 더 새겨 넣었다고 한다.

 

 

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記

 

彰烈巖記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彰烈巖記 / 洪直弼

 

창렬암기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켜켜이 쌓인 울분이 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나는 영월에 와서 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위로 올라가 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한참동안 배회하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아!

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당시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궁녀의 경우는 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묘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어지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아아!

끝없는 우환일지라도 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종묘에 모셔졌고, 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여러 임금께서 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창렬암기 / 홍직필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 낙화암(落花巖) 비석 옆에 세워진 순절비(殉節碑)는 1955년(단기 4288년) 11월 당시 영월면장과 면의원 일동이 건립한 것이다.

 

 

현재의 낙화암 비석은 1924년에 세웠다.

1726년 영월부사를 지낸 윤양래의 탁본첩에 있는 남화암 비석은 금장강 물속에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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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落花巖)

(전면)落花巖

(후면) 碑文

端廟朝諸侍女及諸從人 同日投水殉節 英宗戊寅 愍忠祠賜額 英宗壬戌知府洪聖輔 始立碑刻落花巖三字 隆熙庚戌夏 碑頭半落沉水 同年冬有何不良之人 投碑于水忍不可言 今玆本郡守李錫僖·保勝會長池昌永 詢謀僉同 上報李王 特蒙激勸之恩允 不日告功 立于舊址爾

 

甲子 參月 日

 本郡守 李錫僖

 保勝會長 池昌永

 石工 李聖心

 

(낙화암 후면)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같은 날 (동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영종 무인(영조 34년, 1758)년에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이보다 앞선 영종 임술(영조 18년, 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융희 경술(1910)년 여름에 비석 머리 부분 절반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았는데, 동년 겨울 어떤 못된 부랑자가 나머지 비석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본 군수 이석희(李錫僖) ‧ 보승회장 지창영(池昌永)이 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이왕(李王)에게 보고를 올리고, 특별히 격려하는 윤허를 받은바 힘입어, 얼마 아니 되어, 일을 모두 마치고, (낙화암)옛터에 비를 세우게 되다.

 

갑자(1924년) 三月 日

 본 군수 이석희

 보승회장 지창영

 석공 이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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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비(殉節碑)

(전면)殉節碑

(후면)

李朝 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體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

 

寧越面長金南圭

 面議員一同

 檀紀四二八八年十一月 日 建立

 

(순절비 후면)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도다.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구지(舊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영월면장 김남규

 면의원 일동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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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落花巖)의 슬픈 사연을 뒤로하고.. 금강정(錦江亭)으로 향한다.

 

 

금강공원내에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處)"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 바,
이 비는 강원도 순찰사 巽菴(손암) 李公이 비용을 내고 평창군수 南羲老(남희로)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경춘이 죽은지 24년만인 을묘(1795) 8월이었다.

비문의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월기 경춘은 이시랑이 영월에 왔을 때 처음 몸을 허락한 터이기에

깨끗이 수절하려 하였더니 후임관원이 온 뒤 자주 불러 볼기를 때리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몸단장을 잘하고 들어가서 웃는 낯으로 몸을 조섭할 것이니 수일후에 불러주면 한번 욕정
을 들어 주겠노라고 하고 그 이튼날 아침 부친산소를 성묘하직하고 돌아와 동생의 머리를 최후로
빗겨준 다음 바로 금강 벼랑에 앉아 몇가락의 노래를 부르니 눈물은 옷 자락을 적시었고

비통함은 참기 어려웠다.

이 때 어린 동생이 따라와 있었으므로 속여서 집으로 보내 놓고 분연히 벼랑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으니 때는 임진년(1772)10월이었고 그 때 나이 16세였다.

집안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옷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있어 옷을 헤치고 보니 이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의 죽음이여, 의로움을 좇음이 아니리오. 이번에 도순찰사 손암 이공이 관동지방을
살피던 길에 영월을 지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
주도록 이르니 나 또한 그 전말을 적게 되었는지라 생각컨대 경춘이 죽은지 24년이라 우리 이공이
이를 처음 표창함이니 경춘의 절개는 장차 지워지지 않으리라」

※ 출처 : 지역정보포털 향토자원 > 문화

 

 

※ 아래에 故 박영국 선생 작사 '경춘의 노래'를 소개한다. 
    (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영월을 찾아서' 내용 인용)

 

1. 춘양같이 사랑하다 떠난임    그리던중
    신임사또 수청피해 애인정표 지니고서
    금강정에 몸던지니 이사랑을 울렸다네
2. 눈물을    감추고서 부모산소 성묘하고
    어린동생 머리빗겨 집에다가 달래놓고
    노래불러 낙화하니 동생을    울렸다네
3. 아름답던 고경춘은 이고장의 귀염이라
    시녀같이 순절하니 천기에도 절개있네
    그를기려 동정하는 세상을    울렸다네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殉節之處)’라고 새겨진 이 비석은 경춘이 동강 90도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장소임을 알렸다.

옆엔 작은 낙화암 비석이 동병상련 벗이 돼 주고 있었다.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떨어진 자리에 1795년(정조19년) 8월 강원도순찰사 이손암(李巽菴)이

월주(영월)의 절행부를 살피던 차 이 이야기를 듣고 “천적(賤籍)의 몸으로 이런 일을 해내다니 열녀로다.

어찌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봉급을 털어 영월군수에게 순절비를 세우도록 했다.

 

경춘이 죽은 지 24년 만이다.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09cm, 폭 47cm, 두께 14.5cm다.

 

 

※ 월기경춘순절지처비문(탁본)   *원본보관 : 영월문화원

 

비석 앞 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전면) 越妓瓊春殉節之處 (‘영월 기생 경춘 순절한 곳’이라는 비문)

(후면)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一日盛服而入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 其年十六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此眞烈女也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乙卯八月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전면) 월기경춘순절지처

(후면)
영월기생 경춘(瓊春)은 예전 이 시랑(李侍郞)이 영월 땅에 부임해 왔을 때, (서로)눈에 들은 바 되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런 고로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여 수절코자 하였는데, 후임 관리(부사)가 오게 되자 관아 내의 사람으로 그녀를 강제하는 자가 있어서, 수차례 추초(?楚: 볼기를 치는 형벌)를 당하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서 (관아에)들어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만약 수일간만 부름이 없다면, 마땅히 병난 몸을 잘 조섭하고는 원 하는 바(욕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마침내 아버지 묘소로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와 여러 동생들을 위해 머리를 빗겨 주었다. 이어서 일어나 금장강(동강)변으로 가서는 벼랑 끝 단애에 앉아서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은 치마를 적시는데, 슬픔과 한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린 동생이 옆에 있었기로, 이에 그를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고는, 즉시 분연히 몸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니, 때는 임진년 10월로 그녀 나이 16세였다.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옷깃을 건져 올리는데, 무엇인가 은연히 비치는 것이 있어서 꿰맨 자리를 뜯고서 보니, 과연 이 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녀의 죽음은 지난날 의를 위해 의연히 목숨 바쳤던 이들과 견주어 볼 때, 못함이 없지 않은가!

이제 도순찰사(都巡察使) 손암(巽菴) 이공이 대총재(大?宰)로서, 관동의 절행부(節行部)를 살피던 차에 월주(영월)를 지나다가 보고를 접하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천적(賤籍)에 오른 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니 이는 참으로 열녀로다. 어찌 풍성지도의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봉급을 내어 영월군수에게 그녀가 순절한 곳에 일편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기도록 부탁하고, 또한 나에게는 그 전말의 내용을 기(記)하도록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오늘로 2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드러내어 표장하게 되었으니, 우리 공(巽菴 李公: 李秉鼎)이 아니었다면 경춘의 절행 그것은 어쩌면 인몰되어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을묘(1795년, 정조 19년) 8월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문을 짓고, 영월군수 한정운(韓鼎運)이 비문을 쓰다.

 

 

[헤럴드경제=영월]1771년 어느 이른 봄날, 여느 때와 같이 열다섯 소녀 경춘(瓊春ㆍ본명 고노옥)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빼어난 미모는 늘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숱한 유혹을 뿌리쳐 왔다.

 

경춘은 어린 나이에 사고무친(四顧無親), 막 관기(官妓)가 된 신분이었지만 늘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 해 정월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李萬恢)를 따라 내려온 아들 시랑(侍郞) 이수학(李秀鶴)이 경치좋은 금강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건너편 경춘의 미모에 눈길이 멈췄다. 그 역시 첫 눈에 반했다.

 

수학은 나룻배의 노를 저어 건너갔다. 마주한 두 남녀, 설레는 가슴으로 수학이 고백했다. 그리고 백년가약을 했다.

경춘도 뿌리치지 않았다. 이후 둘의 사랑도 점점 무르익어 갔다. 경춘은 마침내 수학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된다. 

 

달콤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듬해 영조48년 7월29일 문신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전교를 받고 이만회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수학도 경춘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수학은 떠나기 전 ‘입신(立身)해 훗날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의 글을 써서 경춘에게 정표로 남겼다. 경춘은 언제나 품에 안고 기다렸다.

 

그 해 10월21일 새로 부임한 부사 신광수가 경춘의 미모에 반해 수청 들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경춘은 수학과 백년가약을 맺은 정표도 보이며 부사의 청을 거듭 거절하다 수차례 걸쳐 추초(箠楚ㆍ볼기를 치는 형벌)를 받았다.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 부사를 찾아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기를,

“며칠간 만 부름을 멈춰주시면 병난 몸 잘 추스려 원하는 바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윤허를 받았다.

 

이튿날 아버지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금장강(동강) 변으로 향했다.

동생 머리를 빗겨준 후 벼랑 위에 앉아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이 치마를 흠뻑 적시고 슬픔과 한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경춘은 옆에 있던 동생을 달래 돌려보내고 한 송이 꽃으로 강물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임진년 10월,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건져올려보니 옷 속에 뭔가 꿰맨 자국이 있어 풀어봤다. 수학이 건넨 정표였다.

수청을 강요했던 부사 신광수는 이듬해인 1773년(영조49년) 12월에 영월부 감사 과정에서 교체됐다.

 

관기 경춘. 본명은 고노옥이다.

영월 선비 고순익(高舜益)이 자식이 없어 태백산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해 얻은 귀한 딸이다.

이곳에 유배온 단종임금(노산군ㆍ魯山君)이 점지해 준 소중한 자식이라 해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지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살에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어 어린 동생과 함께 이웃의 추월이라는 기생 수양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양어머니도 연로해져 노옥은 경춘(瓊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관기가 된 경춘은 어렸지만 타고난 미모와 가무솜씨가 남달랐다.

 

춘향전, 아니 경춘전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와 이렇게도 똑같을 수가.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만 빼면 전개되는 이야기가 완전 그대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250년 전 강원도 영월 고을에서 있었던 실화다.

 

춘향전 보다 더 춘향전 같은 이 비련의 이야기. 영월 관기 경춘, 고노옥의 한맺힌 사연이다.

그 생생한 이야기가 비석에 새겨져 200년 넘게 그대로 전하고 있다.

 

※ 출처 : 헤럴드경제 남민기자의 천천히 걷는 감성여행
   [테마있는 명소] 영월 낙화암--‘실존 춘향’ 영월 관기 경춘을 아시나요 

 

 

벚꽃과 개나리가 예쁘게 피어있는 금강정(錦江亭)이 오늘따라 더 정감(情感)이 있어 보인다. *^^ 

 

 

민충사[ 愍忠祠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금강정(錦江亭) 뒤편에 있으며,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낙화암(落花岩)에서 몸을 날려 사절(死節)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단종이 처참하게 승하하자 여섯 시녀와 시종 한 사람은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대왕님이 가셨는데 우리는 살아남아 무엇하겠느냐」 하고 금강정으로 뛰어 올라가서

그 옆의 언덕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꽃잎같이 투강 순절 하였던 것이다.

 

그 시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궁녀 宮女  : 자   개 者   介
관비 官婢  : 아가지 阿加之
궁비 宮婢  : 불   덕 佛   德
무녀 巫女  : 용   면 龍   眠 ,  내은덕 內隱德 , 덕  비 德  非

 

한 사람의 시종 이름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묘소는 낙화암 바로 뒤에 있다.

 

시녀들이 낙화암에서 순절하자 단종 혼령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시고 낙화암을 돌아 보셨는데,

강물은 깊어 검푸르고 파도는 드높으매 「나는 왕손이기에 수난을 당한다고 하겠으나 너희들이야

무슨 죄로 이지경이 되어야 하겠느냐」하시면서 탄식하였다는 전설이다. 

 

* 이상 내용은 "영월을 찾아서( 박영국 엮음, 1983년 경성문화사 발행)" 자료 참조

 

 

문이 굳게 닫겨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 너머로 보이는 민충사 사당의 모습..

 

 

* 단종의 시녀와 시종들을 기리는 민충사 *

1457년(조선 세조 3)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낙화암에서 강물로 몸을 던져 그의 뒤를 따랐는데,
민충사는 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시녀와 시종들이 투신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그 장소를
낙화암이라 부르며,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건물은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려 단청이 퇴색하고 낡았다. 이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곧 낙화암 절벽이 나온다.
영월읍민들은 여섯 시녀의 충혼을 기리는 순절비를 세우고 뒷면에 역사적 사실을 음각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 민충사의 유래와 역사 *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1457년(세조 3)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등된 후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영월에서 1457년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을 모시던 시녀 6인도 낙화암에서 금강에 몸을 던져 사절하였다.
이에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1742년(영조 18) 사당을 건립하고 민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1758년(영조 34) 육신창절서원(六臣彰節書院)을 보수할 때 사우를 중건하였고, 다시 1791년(정조 15)에 개축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24일 제사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충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금강정은 조선 세종 10년(1428) 김복항이 세웠다고 전해오나, 영월제영에 따르면 이자삼이 영월군수로 있을 당시
금강(錦江, 현재의 동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빼어난 지 조선시대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대학자인 이퇴계도 금강정에 이르러 금강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또한 우암 송시열도 숙종 10년(1684)에 이곳에 들려 「금강정기」를 남기기도 했다.

 

[금강정(錦江亭)]

 

○ 황희(黃喜)

軒高能却暑  집 높아 더위 물리칠 수 있고,

簷豁易爲風  처마 넓으니 바람 쉽게 든다.

老樹陰垂地  늙은 나무 그늘은 땅에 드리우고,

遙岺翠揷空  먼 묏부리는 푸른 빛 공중에 꽂았다.

 

*신동국여지승람 제46권 /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편에 나오는 황희의 시.

 (관동지에는 관풍루를 읊은 시로 되어 있다고 한다.)

 

○ 이황(李滉)

鵑啼山裂豈窮年  두견새 울어 산 찢어지니 어찌 한 해를 다할꼬,

蜀水名同非偶然  촉수와 이름 같은 것 우연이 아니지.

明滅曉簷迎海旭  별 깜빡이는 새벽 처마 바다 햇살 맞이하고,

飄蕭晩瓦掃秋烟  쓸쓸한 저녁 기와 가을안개로 쓸린다.

碧潭風動魚遊錦  푸른 못 바람 일자 물고기 비단에서 헤엄치고,

蒼壁苔生鶴踏氈  푸른 절벽 이끼 생겨 학 담요 밟는다.

更約道人携鐵笛  다시 도인과 약속하여 쇠피리 가져와,

爲來吹罷老龍眠  다시 올라 피리 불어 늙은 용 잠 깨우리.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 익공계(翼工系) 양식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겹처마에 팔작(八作) 지붕이고 모로 단청(丹靑)을 했다.

 

 

금강정(錦江亭)은 낙화암 밑으로 흐르는 동강 위로 붉은 단풍잎이 어리어 마치 한 폭의 비단 같아 보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금강정은 영월 8경 가운데 금강추월(錦江秋月), 태화단풍(太華丹楓), 계산숙무(稽山宿霧), 봉소귀범(鳳沼歸帆)의 4 경을

모두 볼 수 있는 동강의 빼어난 전망대다.

 

금강추월(錦江秋月)  금장강(錦障江, 동강)  언덕 위의 금강정(錦江亭)에 팔월 한가위 달빛이 비친 밤경치(밤경치)

태화단풍(太華丹楓)  영월의 노적봉(露積峰)이기도 한 웅장한 태화산(太華山)의 아름다운 5색의 단풍경치(가을경치)

계산숙무(稽山宿霧)  금강산 봉우리 같은 계족산(鷄足山)이 안갯속에 솟아보이는 아침경치(아침경치)

봉소귀범(鳳沼歸帆)  동서강 합수처인 금봉연(錦鳳淵)에 서울 왕래 뱃길에서 돌아오는 돛단배가 어울리는 경치(강상경치) 

 

금강정(錦江亭)에서 동강대교 하류 쪽이 동, 서강 합수처인 합수거리로, 옛날에는 한양까지 가는 뱃길이 있었다고 한다.

금봉연(錦鳳淵))은 동강과 서강이 합치는 합수거리에 있으며, 강 건너 팔계 쪽의 검각산 병창 밑에 있는 푸른 소(沼)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태화산(太華山)으로, 영월군과 충북 단양군이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남한강이 산자락을 휘감아 흐른다.

계족산은 금강정에서 강 건너 쪽으로 보이는 산으로 그 형상이 닭의 발처럼 생겼다 하여 계족산(鷄足山)이라고 부른다.

 

 

금강정(錦江亭) 강원문화재자료 제24호.

1428년(세종 10)에 김복항(金福恒)이 세웠다고 하나 영월제영(寧越題詠)에 의하면 이자삼(李子三)이 영월군수로 있을 때
금강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사재를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이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금강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강정」이라는 시(詩)도 전하고 있다.
한편,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1684년(숙종 10)에 금강정에 주위로 펼쳐지는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

건축형식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출입하는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는 머름이 둘러져 있다. 정자 안에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친필인 ‘금강정(錦江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역사적 변천
김복항(金復恒)이 세운 이후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1969년과 1976년에 단청을 다시 칠하는 등의 부분 보수를 하였다.
주위에는 낙화암(落花岩)·민충사(愍忠祠)·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의의와 평가
금강정 아래로는 푸른 동강이 흐르고, 그 앞에는 계족산과 태화산이 자리하여

영월 8경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금강정 주위에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대유학자들의 방문과 기록이 이어진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허준구의 신(新)한시기행 37 영월 금강정」(『강원도민일보』 2004년 11월 23일자)
[네이버 지식백과] 금강정 [金剛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아래 금강정 사진은 클릭하면 좀 더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음)

 

 

錦江亭  退溪  李 滉

 

鵑啼山裂豈窮年。
蜀水名同非偶然。
明滅曉簷迎海旭。
飄蕭晩瓦掃秋烟。
碧潭楓動魚游錦。
靑壁雲生鶴踏氈。
更約道人攜鐵笛。
爲來吹破老龍眠。

 

鵑啼山裂豈窮年。 蜀水名同非偶然。
두견새 울어 산을 무너뜨리니 어찌 세월 모자랄까.

촉나라 물 이름(錦江) 같은 것도 우연은 아니로다.

 

明滅曉簷迎海旭。飄蕭晩瓦掃秋烟。
깜빡 깜빡 새벽 처마끝으로 바다 일출 맞이하고,

우수수 저녁 기왓장에 가을 연기 쓸어가네.

 

碧潭楓動魚游錦。靑壁雲生鶴踏氈。
푸른 못 위에 떨어진 단풍잎 움직임은 고기가 비단 위에 노는 듯하고,

푸른 벽에서 생기는 구름은 학이 양탄자 밟는 듯.

 

更約道人攜鐵笛。爲來吹破老龍眠。
다시 도인과 언약하여 쇠로 된 피리 들고서,

피리 불어 늙은 용의 잠을 깨어 나오게 하세.

 

※ 1573년에 간행된 퇴계집(退溪集)의 자료라고 하는데.. 문집별로 시(詩) 해석이 조금 다르다.

 

錦江亭(금강정)  退溪  李 滉(퇴계 이 황)  

 

鵑啼山裂豈窮年   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는 어찌 한 평생 산이 찢어져라 우는지?
蜀水名同非偶然   촉수명동비우연    촉나리의 강 이름도 한 가지라 우연이 아니구나.
明滅曉簷迎海旭   명멸효첨영해욱    큰 아침 해를 맞으니 가물거리던 처마가 다가오고,
飄蕭晩瓦掃秋烟   표소만와소추연    낡은 기와를 칠하듯 가을 안개 쓸쓸히 나부끼네
碧潭楓動魚游錦   벽담풍동어유금    단풍나무 흔들리는 푸른 물가엔 아름다운 물고기 노닐고
靑壁雲生鶴踏氈   청벽운생학답전    구름이 이는 푸른 절벽엔 학이 융단을 밟고 있네.
更約道人携鐵笛   갱약도인휴철적    도인과의 약속을 바꿔서 날라리 들고서,
爲來吹破老龍眼   위래취파노룡안    남김없이 다 불어 잠자는 늙은 용을 돌아오게 하리라.

 

※ 출처 : 退溪集(퇴계집)  退溪先生文集券之一(퇴계선생문집권지일)  시(詩)  1943년 간행본 인용

 

 

금강정(錦江亭)은 영월읍 영흥리 봉래산 밑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1428년(세종10년)에 군수 김복항(金復恒)이 세웠고 그 뒤로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동으로 금장강에 접해 있고 남으로 금봉연(金鳳淵)이 자리잡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금장강 밖으로 상덕촌(尙德村)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밀적포(密積浦)가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정자 바로 곁에 단종이 죽자 시녀 여섯 명과 한 명의 시조이 몸을 던져 죽은 낙화암(落花岩)이 있으며, 정자 뒤편으로 민충사(愍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자에서 영월 8경 중 4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鵑啼山裂豈窮年(견제산렬기궁년) 두견이 울어 산을 찢어내니 어느 해에 그치려나?
 蜀水名同非偶然(촉수명동비우연) 촉과 강 이름 같음도 우연이 아니어라.
 明滅曉簷迎海旭(명멸효첨영해욱) 달빛 꺼져 가는 새벽 서까래에 아침해 떠오르고,
 飄蕭晩瓦掃秋烟(표소만와소추연) 나부끼는 대 숲에 저녁의 가을 연기 사라진다.
 碧潭楓動魚游錦(벽담풍동어유금) 맑은 못에 단풍 흔들리니 물고기 비단에서 헤엄치듯
 靑壁雲生鶴踏氈(청벽운생학답전) 하늘에 구름이니 흰 학이 양탄자를 밟는 듯,
 更約道人携鐵笛(갱약도인휴철적) 다시 도인과 쇠피리 가져다가,
 爲來吹破老龍眼(위래취파노룡안) 쇠 피리 불어 늙은 용안을 뜨게 하자 약속하네.
 <이황(李滉), 錦江亭>

 

시는 퇴계 이황 선생의 시로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러 지은 듯하다. 시인은 단종의 비극적 삶을 두견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시의 서두를 열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예사롭지 않아 산을 찢어내고 있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그 두견이와 연결된 촉나라의 강(錦障江) 이름과 같다고 하여, 단종의 애처로운 역사적 사실을 중국의 역사와 닮은꼴임을 드러내어 그 슬픔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간다. 달빛 희미해 질 때 아침해는 어김없이 지붕의 서까래 위로 떠오르고, 다시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고 가을의 저녁 마을 연기는 비로 쓸어낸 듯 사라진다. 이는 무한히 시간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음을 아침과 저녁이라는 시간의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 다음 5, 6구절에서는 회화적 수법을 통해 정자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표현하였다. 정자 아래의 맑은 강으로 흔들리는 오색의 단풍나무 잎들이 마치 물고기가 비단에서 헤엄치 듯 한다고 하여, 실제 물고기의 움직임과 단풍나무 잎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섞어놓고 있다. 또한 하늘에 흰 구름 일어나는 것을 흰 학이 양탄자를 사뿐사뿐 밟으며 날아가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퇴계 선생의 뛰어난 회화성의 일면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마지막 7, 8구절에서는 도인(道人)과의 약속을 통해 나이가 들어 이치를 바라보는 시각의 무딤을 쇠피리 소리를 통해 일신해 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도학자다운 끝맺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청연서당>  
 

※ 출처 : 강원도민일보 문화 연재(2004. 11. 23) 게재 내용 (* 인터넷 검색)

             [허준구의 新한시기행] <37> 영월 금강정(錦江亭)

 

 

 

宋子大全卷一百四十四

寧越郡錦江亭記 a_113_108b

 

李侯子三。嘗立朝正言。廢錮累年矣。旣而時事更新。群賢彙征。而侯又抹摋於時世。與君平相棄之矣。侯性好山水。聞寧越有蓬萊,太華,會稽,錦江之勝。悠然有句漏之興。求出爲郡守。其江山淸趣。果愜宿願。而所謂錦江亭者。老而支拄。殆不可徙倚矣。遂割淸俸。將以新之。則監司魚侯翼之聞而嘉之。亦助事力。未幾而良構屹然改觀。則以上諸山。擧入於拄笏之中。而十里淸流。映帶乎憑檻之外矣。侯樂其地僻事簡。日哦其間。蓋屋未就。而詩已成矣。夫江山之名。固有不約而冥會者。人之覽之者。因之而起其遐想焉。然113_108d今蓬萊之上。未必有不死之藥。太華之顚。未必有十丈之蓮。而會稽之下。亦豈有芰荷之水乎。惟所謂錦江者。是蜀中之水。而屢形於草堂之詩。無亦有冤禽之啼血乎。月白山空。如聞其一二聲。則侯必悽然而泣下。不覺淸興之翻成感緖矣。未知侯果然否。聊以書問之。

 

※ 출처 : 한국학자료포털 > 학국학자료DB > 고문서

 

 

금강정기(錦江亭記, 국역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부사 이자삼은 일찍이 정언으로 조정에 나아갔으나 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하였다. 이후 다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조정으로 나아가 군평(君平)과 더불어 시세를 없애버리고 서로 포기하였다. 이무는 산수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는데 영월지방에 봉래(蓬萊), 태화(太華), 회적(會積), 금강(錦江) 등의 명승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연스레 시구(詩句)가 일어나 영월군수가 되어 부임하기를 원하였다. 그곳의 강산이 맑게 비치니 과연 바라던 바와 일치하였다. 이른바 금강정은 늙은이의 지주가 되니 잠시동안 배회할 곳은 아니다. 더군다나 깨끗함을 받들어 장차 새롭게 하니 감사 어진익(魚震翼)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또한 힘을 보태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자를 완성하여 새롭게 보인 즉 모든 산들이 기둥사이에 있고 10리의 맑은 강물은 담 밖에 의지하여 비추는구나!
 이무(李堥)는 그곳에서 잘못된 일들을 간결하고 옳게 처리하니 모든 집들이 취하지 아니함에도 시(詩)를 지으며 성취하였다. 무릇 강과 산의 이름은 진실로 약속된 바가 아니라 가만히 있으며 깨닫고 사람들이 이를 봄으로 인해서 그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봉래산 위에는 반드시 불사지약(不死之藥)이, 태화령에는 10장(丈) 연(蓮)이, 회적산 아래에는 또한 어찌 지하(芰荷)의 물이 있지 않겠는가? 오직 금강이라고 함은 제기(祭器)안의 물과 같으며 초당의 시에 여러 형태로 보이니 또한 어찌 원한 맺힌 금수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월백산이 공허하니 한 두 가지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즉 이 무는 반드시 처연하게 슬퍼하면서 맑음이 번성하는 감정을 깨닫지 못함이라. 이무(李堥)는 과연 서문(書問)에만 의지하지 않았는가?   

 

 

금강정을 뒤로하고.. 메타세쿼이아가 높게 서 있는 길.. 하얗게 떨어진 꽃잎을 밟고 간다. ㅎ

 

 

금강공원을 나서는 길에...  무시무시한 안내판이 보인다.

 

 

2007년 경에 큰 구렁이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장소이다.

 

 

옆에 있는 벚나무는 거목이 되었는데.. 소나무는 크지도 않고 수 십 년 전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아래는 1968년 고교시절에 친구와 함께 금강정으로 놀러 갔던 사진으로, 당시는 소나무 아래로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있었다.

 

 

공원을 돌아 나오다가 그냥 가기가 아쉬워.. 발길을 돌려 다시 벚꽃을 보러 갔다. ㅎ

 

 

누구는 할배보다 꽃이고.. 벌은 꽃보다 꿀이다. ㅎ

 

 

늙은 나무에 핀 벚꽃이지만.. 어린아이 얼굴처럼 곱고 화사하다.

 

 

하얀 꽃잎은 보랏빛 제비꽃 주위로 떨어지고..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나.. 토끼를 만나려나.. 토끼풀 위에도 떨어진다. ㅎ

 

 

이름 모를 못 보던 작은 하얀꽃이 많이 번식해 있다. 별꽃을 닮았는데... 외래종인가?

하여간, 작은 하얀꽃 사이로 떨어지면.. 꽃인지? 꽃잎인지?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 

 

 

라디오스타박물관을 둘러보고, 금강공원을 나서는 길.. 복사꽃과 노란 개나리가 동강과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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