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수승대

박삿갓의 여행 이야기 2022. 12. 30. 18:20

남덕유산(해발 1507m), 무룡산(1492m), 금원산(1353m) 등 해발 1000m 넘는 산 15개가 병풍처럼 둘러싼 분지인>
거창은 예부터 산 깊고 물 맑은 고장이다. 거창의 대표 관광지인 수승대(搜勝臺)는 이런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관리사무소에서 '수승대' 안내 리플릿 하나 들고..[ 수승대 출렁다리 가는길]현수막을 따라 거북바위로 간다.

가는길 이정표 (← 관리사무소· 주차장 350m, 거북바위·요수정 200m→)

일주문 같은 출입구를 지나며 얼핏 보니.. 빛바랜 현판이 걸려 있다.

樂水愼先生藏修之地  요수신선생장수지지   '요수 신권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곳'이라는 의미다.

제일 먼저 구연서원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년(1740)에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이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이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또 수많은 현인들과 은사들이 찾았던 대라 하여 모현대(慕賢臺)라 불렀다. 수승대는 옛날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처음에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1543년 이황 선생이 거창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친다고 이른 4율시에서 비롯됐다. 바위둘레에는 이황 선생의 옛 글이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山水鄕의 고장, 거창 - 높은 산, 맑은 물의 풍광 

 거창 수승대 명승지(2008. 12. 26일 지정 국가명승 제53호)
ㅇ 지정명칭 :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ㅇ 지정종별 및 번호 : 명승 제53호
ㅇ 소 재 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번지
ㅇ 지정사유
 -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줌.
 - ‘수승대’ 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 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임.
(*거창군청 '위천면지' 자료 검색서비스 참조)

여기서 보니 거북이 향상은 아닌데.. 물과 바위, 소나무가 어우러진 경관이 예사롭지 않다.
살짝 얼어 흐르는 맑은 물 위로.. 거대한 바위 풍광이 그대로 계곡 중간에 떠 있는 것 같다.

거북이보다는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 같다고 한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현수교의 빨간 주탑이 보인다.

반석을 건너지르는.. 아치형 돌다리인 구연교(龜淵橋).. 거북이도 기어 다닐까? 
그런데, 콘크리트 구조물 같아 주변의 암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점이 아쉽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명승 제53호 거창 수승대(搜勝臺)
수승대(搜勝臺)는.. 원학동(猿鶴洞) 계곡 한가운데 있는 거북 모양의 화강암 바위다.

바위틈에는 천년 세월에 비바람을 맞으며 모질게 살다간 노송의 잔해들이 뒤따라 커나는 나이든 소나무속에 띄엄띄엄 섞여있고 사면 전신에는 온통 사람들의 이름과 글귀들의 글자로 한 치의 틈이 없으며 평탄한 대위에는 단이 축조되어 있다. 서편에 있는 구연 쪽 대 밑에는 수십 명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암굴이 있고 바닥에 술을 저장하는 장주갑이 있다. 그 밑이 바로 구연소이다.
(*거창군청 '위천면지' 자료 검색서비스 참조)

요수 신권(愼權)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곳인 요수정(樂水停)이라는 정자가 눈앞에 들어온다.
정자를 가로막고 기울어져 있는 소나무에 하심송(下心松)이라는 팻말은.. 머리를 낮추라는 의미인 것 같다.

함양재(涵養齊)는 구연서원 별당으로.. 중종 때 신권 선생이 세우고, 서고(書庫) 겸 강학(講學) 하던 곳이다.

거창 신씨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권(愼權, 1501~1573)이 있다. 자(字)는 언중(彦仲), 요수(樂水)가 그의 호(號)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1540)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승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홍선,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요수정(樂水亭). 
신권의 호가 ‘요수(樂水)’였고, 그의 정자 이름도 ‘요수정’이다. 요수와 요수정은 『논어』의 ‘知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곧 ‘요산요수’에서 따온 말이었다. 누정의 이름은 요수정이라고 지었지만 신권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이름은 ‘요산요수정’이었다. 산도 좋아하고 물도 좋아하는, 지혜로우면서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는 신권이 요수정을 노래한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산수 사이에 정자를 지으니
물을 사랑한다고 산을 버린 것 아니네.
물은 산으로부터 나오고
산은 물을 따라 둘러있네.
신령한 곳이 이로부터 열렸으니
물을 즐기는 뜻이 서로 통하네.
인자와 지자의 일을 헤아리니
모든 일이 오히려 부끄럽네.

위 시는 조선중기 거창 지역의 학자 신권(愼權 1501~1573) 선생이 1540년(중종 35) 
거창 수승대 경내에 요수정(樂水亭)을 짓고 난 후 빼어난 주변 풍광을 읊은 시(詩)다.

요수정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므로, 정자 아래 바위 턱에서 거북바위 찍고..
정자에서 보면 거북이 형상이 보인다고 하는데.. 거북이 코에 고드름이 달렸나? 

*참고로 아래는 수승대 거북바위  (*거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물도 그냥 흐르기 아쉬운 듯 맴돌다 가는.. 거북이 못 구연(龜淵)..
거북이도 건너갈 것 같은 다리.. 구연교(龜淵橋)를 다시 건너가며.. 

위천(渭川)은 덕유산과 남덕유산 등에서 몸을 일으켜 덕유산의 남쪽, 남덕유산의 동쪽으로 흐르면서 황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중국의 강태공 여상이 낚시를 즐겼던 황하의 지류, 위수를 본 따 지은 이름이다. 위천면 상류의 개울을 웃내 또는 상천이라 하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위천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위천(渭川) 건너편 저 위쪽으로..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 같은 바위는.. 새끼 거북바위인가? 위 거북바위인가? 

넓은 반석인.. 수승대 너럭바위|搜勝臺 盤石 

빼 놀 수 없는 볼거리라.. 다시 가서 살펴본다. 세필짐(洗筆㴨)은 시문을 짓고 흐르는 물에 붓을 씻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연반석(硯盤石)은.. 시인, 묵객들이 물가에 앉아 시문(詩文)을 지을 때 사용한 자연 반석 벼루를 뜻한다.

거북바위 아래에 움푹 파인.. 장주갑(藏酒岬)은 자연석 술동이로 술을 부아 놓았던 곳이다.

지난달인 11월 5일 개통한 수승대 출렁다리는.. 성령산과 호음산의 등산로를 연결한 다리다.

수승대 출렁다리는 총사업비 53억 원을 들여 길이 240m, 폭 1.5m, 무주탑 형식으로
2020년에 개통한 ‘거창 Y자형 출렁다리’에 이어, 거창군이 만든 두 번째 출렁다리다.
수승대 출렁다리는 수승대 주차장에 주차 후 거북바위 뒤 무지개다리를 건너 등산로 데크를 통해
진입하면 되고 출렁다리를 건넌 후에는 무병장수 둘레길 데크를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오면 된다.

수승대는 국립공원 덕유산이 빚어 놓은 이 고장 제일의 유서 깊은 명소이다. 북상면의 여러 골짜기에 흘러내린 맑은 물이 위천으로 모여 황산 앞에서 구연폭을 이루고 구연소를 만들면서 창조한 커다란 천연바위 거북대가 수승대로 그 높이는 약10m이고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다하여 구암대 또는 암구대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부터 수많은 현인들과 한인묵객이 찾았던 대라 한다. (*거창군청 '위천면지' 자료 검색서비스 참조)

1543년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수승대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영승마을 살던 장인 권질의 회갑연에 참석했었다. 이황은 동갑내기인
신권(愼權, 1501~1573)을 찾아가 만날 작정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호출하는 바람에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황은 수송대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수승대로 바꾸자는 요지로 신권에게 편지와 시를 보냈다. 대학자의 요청을 받은 신권은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럽네’ 라는 화답시를 짓고 바위에 수승대라는 각자를 새기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황은 1543년(중종 38) 1월 3일에 도착하여 1월 7일 떠나기까지 5일간 영승에 머물렀다. 이황은 지역 사림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송’이 마을 이름으로 아름답지 못하니 음이 비슷한 ‘영승’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였고, 마을 사림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황이 직접 쓴 “영승 마을에 머물며 사락정을 짓다[迎勝村留題四樂亭]."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영승촌의 옛 이름이 ‘영송’이다. 그 이름이 고상하지 못하므로 송(送)을 고쳐 승(勝)으로 하였다. 그 소리가 비슷한 것을 취한 것이다. 영승촌에는 아름다운 시내와 바위가 있었고 마침 시절이 바야흐로 이른 봄이어서 마을이 새로움을 향해 가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영승의 빼어난 경치를 맞이한다.’라고 하여 한 시절의 빼어남을 기록하였다. 사락정은 시내에 임하여 새롭게 지었고 지난해 내가 이름을 지어 보냈다.” 이때 이황이 남긴 시가 “이른 봄의 영승[迎勝村早春]”이었다. 이 현판 또한 사락정에 걸려 있다. 당시 이황은 당시 수승대에 은거했던 신권의 초대를 받았으나 방문할 시간을 내지 못하자 글을 지어 ‘수송대’를 ‘수승대’로 고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신권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수송대’는 ‘수승대’로 바뀌었다. 이황의 방문을 계기로 ‘영송’이 ‘영승’으로, ‘수송대’가 ‘수승대’로 바뀐 것은 고대 국경 지대였던 이곳이 조선 시대 문화 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거창문화대전 홈페이지 내용 일부 참조)

※ 退溪先生文集別集券之一 十九 (퇴계 선생 문집 별집 1권 19)
安陰古縣。有石臨溪。俗名愁送臺。泉石最勝。余於是行。以不暇往見爲恨。亦嫌其名之不雅。欲改爲搜勝。諸公皆肯之。

옛 안음현 시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흔히 수송대(愁送臺)라 부른다. 산수의 경치가 빼어났다 하여 시간이 나면 가보려 했으나,
가 볼 겨를이 없어 안타깝다. 또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여, 수승(搜勝)으로 고치고자 하니, 여러분들이 모두 옳이 여겼다.

搜勝名新換  (수승명신환)    수승이라 이름을 새로 바꾸어 지으니,
逢春景益佳  (봉춘경익가)    봄을 맞는 경치에 아름다움이 더하네.
遠林花欲動  (원림화욕동)    멀리 숲에는 꽃이 피어나려 움트는데,
陰壑雪猶埋  (음학설유매)    그늘진 골에는 그대로 눈에 묻혀있네.
未寓搜尋眼  (미우수심안)    어기저기 싹을 찾아도 아직 붙지 못해,
唯增想像懷  (유증상상회)    오직 꽃봉오리 품은 상상만 더해가네.
他年一樽酒  (타년일준주)    언제 다른 해에 술 한 단지 차고 가서,
巨筆寫雲崖  (거필사운애)    큰 붓으로 벼랑에 구름이나 그리려네.

*搜(찾을 수), 勝(이길 승); 뛰어나다, 名(이름 명), 換(바꿀 환), 逢(만날 봉), 景(볕 경), 益(더할 익), 佳(아름다울 가) 
*遠(멀 원), 林(수풀 림), 欲(하고자 할 욕), 動(움직일 동), 陰(그늘 음), 壑(골 학), 猶(오히려 유): 그대로, 埋(묻을 매) 
*未(아닐 미); 아직 ~하지 못하다, 寓(부칠 우); 붙어 살다, 붙다(식물이 뿌리가 내려 살다), 搜(찾을 수), 尋(찾을 심), 
*眼(눈 안) ; 눈, 눈동자, 구멍, 안광(眼光), 시력(視力), 요점(要點), 어린 싹, 거품, 보다, 만나다
*唯(오직 유), 增(더할 증), 想(생각 상), 像(모양 상);, 懷(품을 회), 樽(술통 준); 술 단지(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
*巨(클 거), 筆(붓 필), 寫(베낄 사); 본뜨다, 그리다, 雲(구름 운), 崖(언덕 애); 벼랑, 낭떠러지  (*한자사전 등 참조)
*搜尋 [sōu‧xún ]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다. 물으며 찾다. (*중국어사전 참조)
*상상 (想像) :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
*언제; 잘 모르는 때를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베끼다; 글이나 그림 따위를 원본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리다.
*맺히다 : 열매나 꽃망울 따위가 생겨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다. (*국어사전 참조)

※ 위 수승대 명명시(命名詩) 한자 풀이(譯)는.. 운율을 맞추어 풀이한 개인적 견해로, 기존의 해석과 상이(相異)할 수 있음.

*구절 해설 첨가 (*영월 박삿갓 개인적인 견해임)
 遠林花欲動 : 멀리(遠) 보이는 숲(林)에는 꽃(花)이 피고자 하는(欲) 움직임(動)이 보이는데, 
 陰壑雪猶埋 : 그늘진(陰) 골짜기(壑)에는 오히려(猶) 눈(雪)이 그대로 잔뜩 덮이어(埋) 있네.
 未寓搜尋眼 : 어린 싹(眼)이 보일까 찾고(搜) 찾아도(尋) 뿌리를 내리어 붙지(寓) 못(未)하여,
 唯增想像懷 : 오직(唯) 꽃봉오리 품은(懷, 맺힌) 모습(像)을 그리는 생각(想)만 더해(增)가네.  

거북바위를 나서며 다시 보니.. 搜勝臺라 새겨진 암각문(岩刻文)이 뚜렷하게 보인다. *^^

*搜(찾을 수)  : 1 (찾을 수)  2 찾다, 뒤지다 3 탐구하다(探求--)  *勝(이길 승) : 1 이기다 2 뛰어나다 3 훌륭하다
*臺(대 대) :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 또는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순수한 우리말로는 이런 곳을 너럭바위라고 하며, 역시 펑퍼짐한 모양의 바위를 말한다. (*한자사전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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