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에 대하여..

기타 자료 모음 2014. 5. 21. 05:45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 본명 김병연(金炳淵)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산다.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오나 그 가족들이 온전히 터 잡고 살 곳이 있겠는가?


    여주, 가평, 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을 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글공부에 힘 쓴다.  나이 스물, 결혼한 그 해, 운명을 다시 바뀌게한
    시골에서의 백일장을 보게 된다.  과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선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 지낸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터와 묘지가 있다.   

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假名)을 김란(金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되는 평민 사상이었다.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이상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옮겨온 글입니다. *^^
  (왼쪽 사진의 풍경은 영월 봉래산의 설경임.)
* 배경 음악은 유영애 작시 / 정덕기 작곡의
  시와 별 그리고 동강(내 마음의 노래 합창단)입니다.
* 작시자인 유영애 교수님은 영월 석정여고 출신입니다. ㅎ

시와 별 그리고 동강
Poem, stars and the east-river

쪽빛 하늘 구름따라 내리 계곡 물소리
노루목 골짜기에 난고향기 가득하네
삿갓 속에 드리워진 한맺힌 사연들
풍자와 해학의 삶 가슴에 울리네
우리 가슴에 우리 마음에 마음 속 깊이 울리네
시와 별 동강이 흐르는 자연이 살아있는 영월
푸르게 피어나는 그 향기 찬란하리라
 
산들산들 바람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어라연 푸른 물결 은빛 햇살 반짝이네
잔잔하게 흐르는 동강변 하얀 자갈
서강 선돌 층암절벽 신선이 노닐던 곳
우리 가슴에 우리 마음에 마음 속 깊이 울리네
시와 별 동강이 흐르는 자연이 살아있는 영월
찬란하게 떠오르는 그 향기 영원하여라


   一步二步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若使畵工模此景
   其於林下鳥聲何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다 보니
    푸른 산 하얀 바위 사이사이 꽃이로다
    화가 불러 이 경치 그리게 한다면
    저 숲 속의 새소리는 어찌 하려나

   - 김병연(金炳淵 1807~1863), <상경(賞景)>,《김립시집(金笠詩集)》

[사진: 2013년 여름 동강 트레킹시 어라연 강변을 지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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