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무릉계곡 트레킹

박삿갓의 산행일기 2018. 7. 11. 22:20

오랜만에 친구들과 무릉도원 명승지인.. 동해 무릉계곡을 트레킹 하였다. *^^

 

동해 무릉계곡은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2008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7호로 지정된 곳으로,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의 무릉도원과 같다"하며,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도 불리운다. 
청옥산에서 발원하여 용추폭포로 흘러내린 물과, 두타산과 청옥산이 사이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 물이
쌍폭포에서 만나 무릉계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여 무릉계곡을 따라 흐르게 된다.

 

▶ 트레킹 일시 : 2018. 7. 8(일요일),   동행인원: 5 명 
▶ 트레킹 경로 : 무릉계곡관리사무소 -2.3Km→ 장군바위 갈림길 -0.3Km→  하늘문 -1.1Km→

                      관음암 -1.1Km→ 계곡갈림길 -0.6Km→ 관리사무소 (총 트레킹 거리 5.4Km)

▶ 트레킹 시간 : 4 시간 10분 (11:55 ~ 16:05)  *점심 식사 시간 포함
▶ 날씨 : 흐리지만 공기가 맑고.. 무더운 영서와 달리 영동 지역은 시원하다. (산행 기온 : 17℃)

▶ 트레킹 일정 : 08:30 영월 출발.. 가는 길에 삼척 '도계유리나라'에 들렸다가.. 11:50 동해시 삼화동 도착.

 

11:55 무릉계곡 입구에 있는 제1주차장은 만차로.. 아래쪽 두타광장에 주차하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제1주차장 상가 주변..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무릉계곡 다니다가.. 이런 날은 첨 본다. *^^

 

 

무릉계곡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정자가 ‘금란정(金蘭亭)’이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향교가 폐교되자

이 고장의 유림 선비들이 나라 잃은 수치와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를 만들고 정각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훼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서생계원과 자손들이 선인의 뜻을 받들어

처음 북평동 단봉 석경지의 계남 심지황 생가 근처에 건립한 정자로, 1958년에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금란정에는 당시 계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으며, 근처인 무릉반석에도 계원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무릉계곡은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일명 무릉도원이라도 불리는 이곳은..

고려 충렬왕 때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금란정 부근에 있는 무릉반석.. 넓은 암반에 군데군데 맑은 못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

무릉반석은 석장(石場) 또는 석장암(石場岩)이라고도 하며 5천 ㎡나 되는 넓은 반석이다.

 

 

반석교 건너편으로 삼화사(三和寺)의 모습이 보인다.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연대'를 창건한 것을 시초로,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는 암자를 세우고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黑連臺)라 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하지만,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삼공정’(三公頂)에다 삼공암을 지었을 때부터 뚜렷한 내력을 갖는다.

그 뒤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삼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빌었으며,

삼화사(三和寺)라는 이름은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하였고 이후 신라 경문왕4년(864)에

범일국사가 세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삼공정에다 삼공암, 즉 지금의 삼화사를 지었다. 

삼공암은 고려태조인 왕건의 원찰이었다. 왕건은 이곳 부처님 전에 후삼국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고

결국 고려건국 20년 만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갈라졌던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키고자하는

소망을 담아 삼화사(三和寺)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동해시는 14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삼화사(전통사찰 제10호)의 창건 비밀과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 조사에 착수한다.

삼화사는 지난 1977년 일대가 (주)쌍용양회의 시멘트 채광권에 들어가면서 사찰이 철거되고 무릉계곡 초입에 있던

중대사(中臺寺)의 옛 터에 사찰을 중창해 옮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시는 2018년 5월 문화재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매장문화재 조사 기관인 (재)강원문화재연구소에 발굴을 의뢰했다.
이번 발굴조사는 1977년까지 삼화사가 위치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명 원삼화사지로 현 무릉계곡 매표소 북측

(삼화동 714번지 일대)이다.면적은 총 1만1282㎡이다.

삼화사 정밀 발굴조사는 금당과 강당,탑지 등 건물지의 배치 구조를 밝혀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오던 삼화사의 유구한 역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원삼화사지와 현재 삼화사가 위치해 있는 중대사지와의 연계성,고려청자가 출토된

삼화동 고려 고분(강원도 기념물 제90호)과의 관련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척주지(陟州誌)』의 「두타산기(頭陀山記)」에 의하면,“중대사(中臺寺)는 산 속 하천의 암석이 즐비한 곳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중대사 앞의 계곡은 무릉계(武陵溪)라 하였다.

 

 

무릉계곡은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무릉반석, 학소대, 병풍바위,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문간재등 빼어난 경승지와
임진왜란 시 격전지로 이름난 두타산성을 비롯한 삼화사, 금란정과 같은 많은 유적지가 남겨져 있는 곳이다.

 

용오름 길은 삼화동 초입에서 시작하여 용추폭포에 이르는 길이 6Km 의 무릉계곡을 말한다. 
삼화사(三和寺) 창건 당시 약사삼불 삼형제가 서역에서 동해로 용을 타고 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약사삼불(藥師三佛)을 싣고 용이 두타산을 오르던 길이라고 한다.

 

※ 참고로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반석교(盤石橋) 아래쪽으로 보이는.. 무릉반석은 금란정에서 부터 삼화사 입구에 이르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일컫는다.

 

 

12:10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니.. 천왕문 앞 쪽으로 못 보던 석상들이 서있다.

 

 

삼화사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2015년도에 옮겨 모셨다고.. 그러고 보니.. 무릉계곡 와본지 3 년이 넘었다.

12지신상(十二支神像) : 십이지를 상징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 얼굴은 동물, 몸은 사람의 형상이다. *^^

 

십이지신상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에는 갖가지 신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불법을 수호하거나 불교인을 지켜주는 신들이다.

제석천이나 범천 등과 같이 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있는 한편, 불교가 전파되면서 여러 지역의 신들이

수용된 경우도 많다. 용과 호랑이는 물론 도깨비까지 등장하는 것은 불교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십이지신은 땅을 지키는 열두 가지 짐승들의 신으로 흔히 우리의 띠에 해당하는 신들이다. 쥐·소·호랑이·토끼·용·뱀·

말·양·원숭이·닭·개·돼지가 십이지신인데 얼굴은 짐승이지만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열두 방위를 지킨다고 한다. 이러한 십이지신은 도교의 방위신앙의 영향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약사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십이지신의 『약사경』을 외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들로 알려져 있다.

 

십이지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그 후 차츰 방위신으

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묘나 탑을 세울 때 방위에 알맞은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민간에서도 무당들이 경을 욀 때 십이지신을 불렀고, 불교에 수용되면서 특히 약사불에게 공양하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십이지신상 (한국의 박물관: 불교, 2000. 4. 20., 문예마당)

 

 

십이지(十二支) :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자기 띠 앞에 서서.. 올부터 경로라 무릉계곡 입장료도 면제다. ㅎ

(*입장료 : 성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700원  *면제 대상 : 경로, 국가유공자, 장애인, 동해시민 등)

 

 

삼화사 경내로 들어가는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을 거쳐야 사찰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고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천왕문(天王門) 안으로 들여다 보이는 삼층석탑.. 중심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은 보수 공사 중인 것 같다. *^^

*적광전(寂光殿)은 화엄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나사나불이나 비로자나불 을 모실 때는 적광전이라고 한다.

 

삼화사는 역사의 격동기마다 수난을 겪어 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폐허가 되었고 한말 일제가 짓밟았던

시절에도 삼척 지방의 의병들이 두타산에서 봉기를 하자 의병의 근거지라 하여 왜병에 의해 또다시 불태워진다.

그리고 1977년. 두타산 입구 삼화동에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며 삼화사도 그 채광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근대 산업화 물결에 천년고찰의 절터는 결국 완전히 파헤쳐 져 채석장의 흙더미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삼화사는 그 위협과 시련마저 견뎌내고 스님들과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옛 절 모습 그대로를

지금의 터로 옮기기에 이른다. 그리고 증, 개축을 꾸준히 해 옴으로써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삼화사 왼편 템플스테이 위쪽으로 보이는 중대폭포..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폭포인데.. 오늘은 중대한(?) 폭포다.

 

 

12:30 학소대(鶴巢臺)에 이르니..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소리에 학들이 놀라 달아난 것 같다. ㅎ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쌓아 놓은 듯한 모양새로 절벽을 이루고 청옥산 산기슭 관음암 부근

동굴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지그재그로 학소폭포(비단폭포)를 이루며 바위를 타고 내리는 곳이다.

 

학소대 [鶴巢臺, Haksodae]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에 있는 바위이다. 『척주지』에 게재된 「두타산기(頭陀山記)」에 "동대사를 지나자

암벽에 바짝 붙어 기어 올라가야 해서 두 발을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이에 학소대에서 쉬었다.

이곳에 이르니 산의 기세가 더욱더 우뚝하고 높고 험하여 해가 높이 올랐는데도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고 있었다.

… 앞산 봉우리에는 옛날에 학의 둥지가 있었으나 학이 날아오지 않은지가 60년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에서 학의 둥지와 관련해서 이름이 생겼음을 엿볼 수 있다. 동골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날 때

폭포를 이루는데 학소폭포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학소대 [鶴巢臺, Haksodae]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鶴떠난지 이미 오래되어 대臺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바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무릉정공(武陵亭公) 최윤상(崔潤祥)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학(鶴)이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대(臺)는 비었다지만.. 배를 띄울 만큼 맑고 시원한 물은.. 누구를 따라 어디로 흘러갔을까..?

이제 배를 띄울 수 없으니.. 우리네 사연을 적은 종이배라도 띄워 볼까..? 무릉도원 복사꽃잎을 담은 나뭇잎 배를 띄워볼까..?

 

 

신록처럼 우거진 숲길.. 공기도 맑고 시원한 바람이.. 마치 봄 산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로 위쪽에 다리가 있지만.. 이 정도쯤이야.. 계곡물을 건너야 더 재미있다. 단, 고아 등산화 필수.. ㅎ

 

 

폭포와 바위 등 절경이 펼쳐지는 이 길은 옛날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보부상인들, 공무수행 관리 등이 한양으로 오갈 때

이용했던 지름길로 계곡을 타고 산을 넘어 정선과 임계로 해서 서울로 오갔으니 최고의 절경을 가진 옛길이라 하겠다.

(*'동해관광' 홈페이지 자료 인용)

 

옥류동은 용추폭포 가는 중간쯤에 있으며, 이 일대는 넓은 암반에 흐르는 계곡물의 수심도 깊지 않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물이 옥처럼 맑다고 하여 옥류동(玉流洞)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

 

이름난 산치고 '옥류동'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옥같이 맑은 계곡물에 병풍같은 기암괴석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이

'옥류동'이라 할 만하고, 물줄기가 발원하여 내려오는 곳이 청옥산(靑玉山)이니.. 옥류(玉流)라 부를만한 곳이다. ㅎ

 

 

골마다 사람들이 가득하고..

 

 

골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 흐른다. *^^*

 

 

13:00 쌍폭포, 용추폭포를 300 미터 앞에 두고.. 하늘문 가는 길로 방향을 바꾼다. *^^

 

 

하늘문 갈림길 이정표 (↑용추폭포, 쌍폭포 300m, ↓무릉계곡관리사무소 약 2.3Km, 하늘문 0.3Km→)

 

 

배도 고프고... 밥 먹을 자리를 찾아..

 

 

힘들게 내려가 보니..

 

 

점심 먹을 자리로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다. 명당(明堂)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일컫는 말이다. ㅎ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는.. 굴러떨어질 것 같아 겁나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위는.. 장군바위(?) 같다.

이곳 위치는.. 옥류동을 지나 선녀탕에 이르기 직전에 계곡을 따라 거대한 기암괴석이 즐비한 곳이다.  

장군바위는 용맹스러운 장군의 얼굴을 닮았다 하며, 거대한 바위 아래로 힘찬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계곡물에 발을 담가보더니.. 시리도록 차다며.. ㅠ,ㅠ

 

 

13:10~13:35 늦은 점심 식사..

 

 

우리는 집에서 싸 온 김밥 한 줄에 바나나 한 개씩.. 오늘 아침 텃밭에서 따 온.. 유기농 오이와 토마토.. 해외직구 건망고.. ㅎ 

 

 

식사는 뿔뿔이 흩어 앉아.. 각자 해결이다. *^^

 

 

와~ 김밥 두 줄씩 먹고.. 커피까지 마신다. *^^

 

 

새로 산 배낭 온도계(YCM 정품).. 제법 잘 맞는데.. 현재 17℃로 엄청 시원.. 좋다. ㅎ

 

 

13:37 점심 식사 후.. 쌍폭포, 용추폭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대장이 앞장서 하늘문으로 바로 간다.

 

 

하늘문으로 가는 길.. 태풍이 지나간 뒤라.. 골짜기마다 폭포 소리가 우렁차다.

 

 

정말.. 골마다 물도 많고.. 사람도 많다. *^^

 

 

13:45 피마름골 도착. 하늘문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이 보인다.

 

 

나무꾼과 선녀도 하늘문으로 올라갔을까..? 사슴도 보인다. *^^

 

 

철계단 아래쪽의 피마름골은 임진왜란 때 전사자들의 피가 많이 흘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철계단.. 수직에 가까운 경사에 300여 개의 철계단이 급하게 이어진다.

 

 

계단 위로 하늘로 통한 네모진 바위문(門)이 올려다 보인다. *^^

 

 

하늘문을 통과하여.. 내려다보이는 모습..  

 

 

계단 길이 끝난 줄 알았더니.. 관음암 가려면 몇 번 더 철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ㅠ,ㅠ.

 

 

14:10 거북바위 도착..

거북은 장수를 상징한다.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가 무릉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안내판 내용 참조)

 

 

왼쪽 거북이가 눈도 있고 입도 있다고 하는데.. 무릉계곡을 굽어보는 거북이는.. 오른쪽 삼층 거북이 같기도 하니.. *^^

불교 용어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니.. 보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영어: everything depends on the mind )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르는 말로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무릉계곡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성12폭포는.. 두타산성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산성 일대로 떨어지는 폭포로,

12개의 폭포가 연이어 있다고 하며.. 비가 많이 온 뒤라 길게 이어져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장관이다.

 

 

과연..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도 불릴 만 하다. *^^

 

 

수십 척 산성12폭포를 배경으로 넣으려니.. 6 척은 떨어져서.. 사이좋게(?) 찍는다. *척(尺: 자 척) 약 33cm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소나무..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지도 않고.. 그대로다. *^^

 

 

골마다 물이 흘러 폭포를 이루고..

 

 

벼랑 끝 바위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이곳이.. 신선이 오줌 누던 자리라고.. ㅎ

 

 

엉덩이 모양이.. 여자 신선이었을 것 같은데.. 겁이 없었나 보다. ㅠ,ㅠ

 

 

바로 아래로는 못 내려다 보고.. 옆을 보니 완전.. 까마득한 수직 절벽이다.

 

 

신선바위 (神仙岩)란 옛날 아름다운 무릉계곡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신선이 앉았던 자리로

천기가 흐르는 신성한 장소로 불리게 되었으며, 또한 이곳 엉덩이 모양의 장소는 인근의 남근바위와 함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자식을 점지해 주는 소원명당으로 유명하며,

KBS, MBC, jBS 등 많은 방송사 프로그램에 방영된 곳이다. (*이상 안내판 내용 참조)

 

 

남근바위를 안 보고 갈 수 있나?  나뭇가지 사이로 어렵사리 남근바위를 찾아본다. (*신선바위 오른쪽 산비탈 방향.. 줌 촬영)

 

 

관음폭포로 흐르는 물길 같은데.. 물이 늘어난 계곡을 건너며.. 재미들렸다. ㅎ

 

 

14:50 관음암(觀音庵)에 이르니.. 거대한 자연 암반 위에.. 그리 오래되지 않은..7층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약 1.4Km 지점에 위치한 관음암은 예전에는 지조암(指祖庵)이라 했으며,
일설에는 산쥐들이 길을 안내하여 지은 암자라 하여 쥐조암이라고도 불려 졌다고 한다.
옛날 어느 스님이  땔감을 하려고 나무를 베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쥐가 그 나무에서 나온 톱밥을 물고 사라졌는데,
이를 이상히 여긴 스님이 쥐를 따라갔다가  톱밥을 한 군데에 모아둔 것을 보고 이곳이 암자를 지을 장소인가 여겨   
그곳에다 암자를 지었고, 이 암자가 바로 지조암이라는 전설이 있다. ㅎ

 

 

조계종 4교구본사 월정사 말사 삼화사의 산내암자인 관음암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설명에 따르면 ‘관음암중건모연기’엔 고려 태조 1년인 918년에 용비(龍飛)대사가 창건해

오랫동안 지조암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단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이란 지적도 적지 않다고. 용비는 임금이 등극하는 일을 뜻해서다. 용비라는 말이 등장했으니,

관음암이 창건 때부터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는 정도로 미루어 짐작해봄직 하다.

해서 태조 4년, 즉 921년 창건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왕실 지원으로 중건도 됐다고 한다.

 

태조 왕건 즉위 20년인 934년, 통일 전쟁으로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던 왕은 민심을 다독이고자 했다.

신라시대 고찰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바꾸고 노비와 밭을 하사했다. 후삼국을 통일했다지만

서로 칼을 겨눴던 마음은 쉽게 치유할 수 없었을 게다. 그리고 죽어간 생명붙이들의 원망을 어찌 다 달래랴.

“셋이 조화를 이룬다”는 ‘삼화(三和)’라는 말에 왕건의 깊은 참회와 백성의 안녕을 담았으리라.

삼화사는 날로 번창해 8개 암자를 뒀고, 이 때 관음암이 중건됐다는 얘기다.

 

관음암은 부침을 겪었다.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 화마로 소실된 암자를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의 주선으로 재건했으나,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때 연기와 함께 잿더미가 됐다. 1959년인지 1956년인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다시 중건되면서

관음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작은 암자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자비로 품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관음암에 걸음해서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두타산 관음암 ( 2013.06.24 15)

 

 

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입고 있는 인법당(人法堂)은.. 처마 아래에 관음암(觀音庵)의 편액을 달고있다.

인법당은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머무르는 곳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 혹은 승방을 가리킨다.

 

觀音(볼 觀, 소리 音)이라, 소리를 본다니.. 소리를 듣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으나..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의 준말이며,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은 괴로울 때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음성을 듣고 구제하여 주신다는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법당 오른쪽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독성과 칠성, 산신을 함께 모신 작은 법당 그리고 돌에 새긴 산왕대신이 나란히 앉았다.

 

 

온화한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15:10 관음암(觀音庵)을 내려서는 길도.. 골짜기마다 폭포 소리가 크게 울린다. *^^*

 

 

삼화사(三和寺)에 이를 즈음.. 119 차가 급하게 올라온다.. 웬일일까?.. 괜스레 걱정이다.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인도 아리안어 계통으로 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인 dhuta의 음역(音譯)으로

두다(杜茶) 또는 두다(杜多)라고도 쓴다. 뜻은 수치(修治; 갈고 딱아 다스린다), 기제(棄除; 버리고 없앤다)로..

이는 의식주에 대한 탐탁을 제거하여, 몸과 마음(心身)을 수련라는 데에 그 뜻이 있으며, 12가지 생활규범을 세워서

흔히 12두타행(十二頭陀行)이라 한다.

 

*12두타행(十二頭陀行) 

①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머물 것.

②항상 걸식으로 생활한다.

③걸식을 할 때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한다.

④하루에 한끼만 먹는다.

⑤과식을 하지 않는다.

⑥정오가 지난 후에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⑦해지고 떨어진 옷을 입는다.

⑧삼의(세벌의 옷)만을 지닌다.

⑨무덤곁에서 거주한다.

⑩나무 밑에서 머문다.

⑪노지에 앉는다

⑫항상 앉는 자세를 취하며 눕지 않는다.

 

두타산 삼화사(頭陀山 三和寺) 일주문.. 세속의 번뇌를 벗고자.. 산을 돌아다니며.. 두타 수행(?)을 하고 나선다. ㅎ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하니.. 이 같은 산행이 두타 수행이 아닐까?

 

일주문은..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 한 줄로 세워 문을 지탱하는 구조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하며,

모든 중생이 자유롭게 드나들라는 의미로 문을 달지 않으며.. 속세와 경계가 되는 산문(山門)이다.

.

*산문(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는 일주문(一柱門)과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천왕문(天王門)과 둘이 아닌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 등을 말함. 

 

 

천여 명이 앉아도 너끈할 만큼 크고 흰 너럭바위(6,600㎡)가 계곡 초입에서 무릉계곡의 상징처럼 얼굴을 내민다.

넓적한 자연 암반을 씻어내리며 흐르는 맑은 물이 이루어놓은 곳곳의 작은 못에 발을 담그고 마냥 시상(詩想)에 취했을

시인묵객들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써놓은 글씨들, 지금은 자연 훼손이라 하여 지탄받아 마땅할 낙서들이

그 너른 바위를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것도 있고,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양봉래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

(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달필도 있다. 그러나 김아무개, 이아무개 언제 다녀가다 식의 섣부른 감상은

단지 낙서일 뿐 풍류는 될 수 없을 뿐더러 천년 만년을 두고 지울 수 없는 자연 훼손에 불과하니 삼가할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릉계곡과 삼화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옛 풍월객들의 발이 끊이지 않던, 무릉반석

무릉계곡 금란정 위쪽에서부터 삼화사 입구에 이르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가리킨다.

옛 풍월객들이 수도 없이 이곳을 찾았으며, 이름을 천추에 남기려는 선비들은 반석에 이름을 새겼다.

이 글씨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기간에 썼다는 설과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기간에 썼다는 암각서로서

동해시에서 오랜 세 패에 글자가 희미해지고 마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보존하기 위해  모형석각을 제작하였다.

옥호 거사가 쓴 초서 12자는 명작으로 남아있다. 1958년 세워진 금란정에는 계원들의 시구 현판이 걸려있고,

북쪽 삼화사의 풍경소리는 은은하다. (*이상 동해시청 홈페이지>동해관광 자료 인용)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 물과 동리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 

 

※ 무릉반석은 무릉중대반석(武陵中臺盤石)의 약칭이라는 자료도 있다.. (*삼척신문.com  축제·관광> '무릉계곡명승지' 참조)

※ 반석 (盤石/磐石) : 1. 넓고 평평한 큰 돌. 2. 사물, 사상, 기틀 따위가 아주 견고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국어사전 참조)

 

※ 무릉(武陵)이란 이름은 중국 최고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에서 연유한다.

※ 무릉도원(武陵桃源) : 복숭아나무가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며, 신선들이 사는 이상세계로,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별천지(別天地)로 이상향(離想鄕, utopia)을 이르는 말이다.

※ 선원((仙源) : 예로부터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을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고 부름.

 

※ 중대(中臺) : 연꽃 중심에 부처의 대좌(臺座)를 만드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국어사전 참조).

※ 천석(泉石) :  ①샘과 돌  ②산수(山水)의 경치(景致)  ③水石(수석)  (*한자사전 참조)

 

※ 두타(頭陀) : 불교용어로 '벗다, 씻다, 닦다'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를 음차(音借)한 것임. 

※ 두타 (頭陀) [명사] <불교> (*국어사전 단어)
   1.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일.
   2. 산과 들로 다니면서 온갖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는 일. 또는 그런 승려.

※ 동천(洞天) [dòngtiān]  1.신선이 사는 곳. 2.별천지. 딴 세상. 황홀경. (*중국어사전 참조)

※ 동천(洞天) : 1.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2. 깊고 큰 골짜기. (*국어사전 참조)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란..

동양의 근본 사상인 유,불,선 삼교의 동양사상으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조화, 통일, 일체 화합임을 의미하는데..

 

무릉선원(武陵仙源)은.. 도교(신선)사상으로 이상향을 추구하는 염원과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나타내고,

중대천석(中臺泉石)은.. 불교 또는 유교사상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하면서                               

                                  인간의 내재적 도덕성을 자연적인 발로로 나타내며,    

두타동천(頭陀洞天)은.. 불교사상으로 번뇌의 티끌을 없애며 의식주에 탐착(貪着)하지 않고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여

                                  이 땅에 불국정토를 이루고자 하는 원력(願力)을 나타낸다고 한다. *^^

 

※ 암각서 아래에 옥호거사신미(玉壺居士辛未)라는 각서가 있는데,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초서 12자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중 신미년(1571)에 썼다는 설과

    옥호자 정하연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중 신미년(1751)에 썼다는 설이 있다.

 

※ 동해시에서는 오랜 세파에 글자가 희미해지고 마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보존하기 위해

   1995년도에 모형석각을 제작하였다. (*금란정 앞  쪽에 있는 '무릉반석 암각서' 모형 석각 안내판 참조)

 

 

16:05 두타광장으로 트레킹 완료.. 광장 주차장에 있던 많은 차들이 대부분 나갔다. ㅎ

 

 

16:50~18:10 동해약천온천실버타운에서.. 오랜만에 온천도 하고.. 

 

 

묵호항 인근 까막바위 해변길..

 

 

어느 횟집에서.. 먹음직스러운 바다회.. 이제 회는 못 먹지만.. 맥주 한 잔은 같이 할 수 있으니.. 좋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어두워진 밤바다에 묵호항 불빛이 비친다.

 

 

※ 참고 사항

 

신선이 노닐었다는 바로 그곳, 무릉계곡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명승지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무릉계곡 명승지는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계곡으로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현존하는 선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태고의 신비와 전설 속에 무릉계곡명승지는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관광명소이다.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에

삼척부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하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무릉계는 수많은 관광객을 도취시키며,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로,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동해시청 홈페이지>동해관광 자료 인용)

 

동해 무릉계곡 [東海 武陵溪谷]

호암소에서 용추폭포까지 이르는 약 4㎞에 달하는 계곡을 가리킨다.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며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에 따라 '무릉도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타산(頭陀山)과 청옥산(靑玉山)을 배경으로 하는 이 계곡은 기암괴석과 무릉반석, 푸른 못 등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이승휴가 머물며 '제왕운기'를 집필하였고, 이곳을 찾았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기념각명(刻名)이

무릉반석(盤石)에 새겨져있다. 호랑이가 건너뛰다 빠져 죽은 소(沼)라는 전설이 있는 호암소가 계곡 입구에 있고,

한말 유림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금란정이 있다. 용추폭포(龍湫瀑布)와 쌍폭(雙瀑)가 장관을 이룬다.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2월 5일 명승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해 무릉계곡 [東海 武陵溪谷] (두산백과)

 

무릉계곡 [武陵溪谷, Mureunggyegok]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1,353m) · 청옥산(1,404m) · 고적대(1,354m)에서 발원한 계류들이 흐르는 골짜기이다.

구체적으로는 삼화사에서 쌍폭에 이르는 일대를 이른다. 『척주지』의 「두타산기(頭陀山記)」에 의하면

"삼화사는 가장 아래쪽에 있었고, 중대사(中臺寺)는 산속 하천의 암석이 즐비한 곳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중대사 앞의 계곡은 무릉계(武陵溪)라 하였다. 그런데 산속 하천의 암석이 아름다운 곳은 모두 옛 삼척부사였던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무릉계의 위치 · 기원 · 역사를 시사해주고 있다.

『여지도서』에 중대사는 "삼척부 서쪽 40리 두타산 아래 51간이다."고 적혀 있다. 이 무릉계곡은 신선이 노닐었던 곳이라 해서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정확한 작명 시기는 알 수 없다. '무릉도원'은 중국 고대 진나라 도연맹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말로

'이상향' · '별천지'를 뜻하는데, 이곳 무릉계에도 계곡물, 역사유물, 그리고 자연경관(무릉반석 · 관음폭포 · 용추폭포 · 병풍바위 ·

장군바위 · 선녀탕 등의 기암괴석과 절경)이 어우러져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무릉반석과 용추폭포는 각각 동해팔경 중 하나다.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에도 무릉계(武陵溪)라고 표기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릉계곡 [武陵溪谷, Mureunggyegok]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무릉도원을 찾아가자

무릉(武陵)이란 이름은 중국 최고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에서 연유한다.

세상의 삶이 행복한 이상향의 낙원으로 무릉도원 같음을 바랄 수는 없다. 아니, 그렇다면 너무 무료하고

삶이 무의미해질 것 같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려 한다면 동해가 자랑하는 무릉계곡을 찾아보자.

 

3시간의 산책 같은 산행길은 무릉도원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계곡 시작을 알리는 무릉바위는 1,000명이 앉을 수 있다는

거대한 암반이다. 표면을 적시듯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물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는 듯하다.

무늬를 새기듯 바위를 장식하는 수많은 글귀들은 긴 세월 속에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가끔 조악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안타까움도 있지만 양사언, 김시습 등 당대 최고의 문객들이 노래한

계곡미를 만날 수 있는 바위들이다.

 

동해의 명산인 두타산과 청옥산이 함께 만들어내는 계곡은 바다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최고의 절경이다.

4㎞를 이어가는 완만한 산행길은 끊임없는 절경으로 이어져 있고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로 화답한다.

무릉바위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금란정을 지나 계곡의 문을 열듯 자리 잡은 삼화사는 계곡 탐방의 마지막 쉼터가 된다.

 

이어지는 산행로는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쌍폭, 용추폭포 등의 비경을 하나씩 보여준다. 물과 바위가 만드는 경관은

쌍폭과 용추폭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두타산 등반을 위한 발걸음이 아니라면 용추폭포까지의 산행이 좋다.

영동 이남지역의 사람들이 옛 한양을 찾아가는 지름길로 이곳을 지나 두타산을 넘어 정선을 향해 갔다 한다. 힘

들지만 아름다운 한양길이 되었을 것 같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릉계곡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무릉도원 [武陵桃源] 중국인의 '별천지' 사상.. 깊은 산속에 숨겨진 낙원이 있으니

산속을 헤매던 남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낙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풍요로운 논밭이 이어져 있고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며칠 간 머물다가 남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 오려고 하지만 낙원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낙원'은 신비에 싸인 별천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릉도원 [武陵桃源] - (낙원, 2000. 9. 7., 도서출판  들녘)

 

 

삼화사(三和寺)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두타산(頭陀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

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한편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

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었다. 명문의 판독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12월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절에서는 대적광전을 지어서 이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

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대승암(大乘庵)·성도암(成道庵)·은선암(隱仙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명승지인 두타산성(頭陀山城)·오십정(五十井)·용추폭포·학소대(鶴沼臺) 등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 한국사찰전서  (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이상 삼화사 자료 한극민족문화백과사전 참조)

 

 

삼화사 건립연대 

삼화사 유래

 

...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

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

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

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이상 이미지 및 자료 출처 : '두타산 삼화사' 홈페이지  삼화사 > 건립연대, 삼화사유래)

 

 

두타 [頭陀, Dhuta]
범어 dhuta의 음역이다. 두다[杜茶]. 두다[杜多]. 투다[投多]라고도 쓰며 두수[枓수]. 두수[斗藪]. 수치[修治]. 기제[棄除]라 번역한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두수[枓수] 두수[斗藪]란 번뇌의 때를 떨어버린다는 의미다.

두타의 생활규범에는 12조항이 있는데 이것을 12두타행이라 한다.
[1] 재아란야처 [在阿蘭若處: 인가와 떨어진 종용한 숲속에 머물 것] [2] 상행걸식 [常行乞食: 항상 걸식할 것]

[3] 차제걸식 [次第乞食: 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말고 순서에 따라 할 것] [4] 수일식법 [受一食法: 하루에 한 번 먹을 것]

[5] 절량식 [節量食: 과식하지 말 것] [6] 중후부득음장 [中後不得飮漿: 중식이 지난 정오 이후에는 과실즙.꿀 등도 먹지 말 것]

[7] 착폐납의 [着弊衲衣: 혜지고 헐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을 것] [8] 단삼의 [但三衣: 삼의 외에는 소유하지 말 것]

[9] 총간주 [塚間住: 무덤 곁에 머물며 無常觀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 [10] 수하지 [樹下止: 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없애기 위해

나무 밑에 기거 할 것] [11] 노지좌 [露地坐: 지붕이 없는 한데에 앉을 것. 나무 밑에 자는 경우 습기.새똥. 독충의 해가 있기 때문]

[12] 단좌불와 [但坐不臥: 항상 단정하게 앉아 있고 눕지 말 것] 이상과 같은 내용이며 두타를 행할 때나

여러 지방을 두루 순례할 때 비구가 항상 휴대해야만 하는 18종의 도구류를 두타의 18물 또는 18물 이라 한다.

후세에 이르러 두타란 말의 의미는 산이나 들 그리고 세상을 편력하며 온갖 고행을 인내하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의 수행이란

개념으로변화도었으며, 이때 삼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옷을 자루 속에 넣어서 목에 걸고 다녔는데

이 자루를 두타대[頭陀袋]라 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가섭존자가 두타제일로 칭송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타 [頭陀, Dhuta]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두타 [頭陀, Dhuta] 
<佛> 탁발 수행(托鉢修行).
① 번뇌와 의식주의 탐욕을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 두다(杜多). 두수(抖擻).
② 산과 들로 다니며 밥을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며 불도를 닦음.

또 그런 중. 두수(抖擻). 탁발(托鉢). 행각(行脚).

或有山居蘭若 頭陀苦行(혹유산거난야 두타고행 ; 혹은 산의 절간에 살며 두타 고행을 한다.)<법원주림法苑珠林>
[네이버 지식백과] 두타 [頭陀, Dhuta] (한시어사전, 2007. 7. 9., 국학자료원)

 

 

※ 아래 등산안내도는 클릭하면 좀 더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음.

 

 

*트레킹 [trekking]  전문적인 등산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산악 자연 답사 여행.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산의 풍광을 즐기는 여행의 한 형태 (*등산상식사전)

*원래는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소달구지를 타고 하는 여행'이란 뜻으로 유럽 사람들이

  대자연을 찾아  아시아의 고원을 천천히 걸어 여행한 데서 생긴 말이다. (*체육학대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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